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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로운백년 Oct 05. 2023

은재와 은재, 무열과 무열, 박연선의 이름

드라마 <얼렁뚱땅 흥신소>, <청춘시대>

은재와 은재, 무열과 무열, 박연선의 이름

드라마 <얼렁뚱땅 흥신소>, <청춘시대>




무심코 TV 채널을 돌리던 어느 주말 저녁, JTBC에선 낯선 드라마가 방영 중이었다. 예쁜 필터를 씐 듯 뽀샤시(?)한 화면에 아기자기하고 소녀 취향이 듬뿍 담긴 인테리어의 집이 등장했고, 곧이어 한승연이 나타났다. 제목은 <청춘시대>였다. 전반적으로 취향이 아니었다. 아이돌 출신 배우에 왠지 모를 거부감이 있었고, 특히 한승연의 연기에 큰 감흥은 없던 때였다. 게다가 지나치게 예쁜 화면 구성을 보며, 다소 유치한 시트콤이나 흔한 로맨스물이겠거니 생각했다. 잠시 멈추었던 채널을 다시 옮기려던 찰나, 누군가의 입에서 익숙한 이름이 들렸다.


“유은재!”


단숨에 귀를 사로잡는 단 하나의 이름에 채널을 돌릴 수 없었다. 설마…? 하는 생각과 동시에 순식간에 드라마에 빠져들었다.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확인이라도 시켜주려는 듯 ‘은재’라는 이름이 한 번 더 등장했다. 길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검색해 보지 않고도 확신했다.


박연선 작가님이구나!




박연선 작가 하면 흔히들 영화 <동갑내기 과외하기> 또는 드라마 <연애시대>를 가장 많이 언급한다. (실제로 그분의 드라마 중 최고 시청률은 <연애시대>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에게 그녀는, 그녀의 작품 중 가장 흥행에 실패했다고 볼 수 있는 한 작품으로 남아있다. 바로 2007년쯤 KBS2에서 방영했던 <얼렁뚱땅 흥신소>





이른바 ‘비운의 드라마’라고 불리는 <얼렁뚱땅 흥신소>는 당시 크게 흥행했던 사극 2편(MBC <이산>, SBS <왕과 나>)의 등쌀에 말 그대로 처참한 시청률을 기록했었다. 방영 내내 시청률이 3~4% 내외였는데, 방영 시기가 2007년이었다는 점을 고려했을 땐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시청률이었다. 당시엔 드라마 시청률이 10% 초반만 되더라도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다고 평가할 정도였는데, 2%라니. 말 그대로 처참한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얼렁뚱땅 흥신소>를 포기하지 않았다. 모두가 열광하는 다수보다는 소수에 눈을 돌리는 특유의 아웃사이더 감성이 발현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이 드라마가 좋은 이유는 기획 의도 때문이었다. 기획 의도를 수십 번 읽고 또 읽었다.


‘사랑 이야기가 아닌 드라마를 하고 싶다.’



여기서도 사랑 저기서도 사랑, 경찰서에서도 사랑, 법정에서도 사랑, 병원에서도 사랑. 지금처럼 장르물이 주목받기 전이었고, 장르물을 가장한 로맨스물이 쏟아지던 때였다. 시청자들은 물론 사랑을 예찬하던 나마저 사랑에 지쳐갈 때쯤, 대놓고 사랑 이야기임을 거부한 드라마의 등장이었다. ‘성장’이라는 키워드와 나이를 먹을 대로 먹은 ‘어른들의 2차 성장’ 너무나도 매력적인 소재였다. 거기에 더해진 박연선 특유의 만화적 상상력과 치밀한 대본이 극의 완성도를 끌어냈다. 덕분에 나는 한때 ‘상처’라는 단어에 꽂혔었고, 학창 시절 썼던 대부분 시나리오의 전반에는 박연선 작가가 했던 대로 어른들의 2차 성장이 깔렸었다. 과거의 상처와 이를 극복하며 현재와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는 등장인물들의 이야기. 유명한 드라마 작가인 김수현, 김은숙, 박지은 등이 이름을 날리는 와중에도, 나는 언제나 박연선을 꿈꿨다. 그 누구보다 인물들의 과거 속 상처를 집요하게 파고들고, 회복의 과정을 가장 따뜻하게 그릴 줄 아는 작가라고 생각했다.


박연선 작가의 특징 중 또 하나 유명한 것이 바로 이름이었다. <얼렁뚱땅 흥신소>에는 태권도장 사범인 박무열, 어린 시절 상처를 가진 부잣집 딸 유은재가 등장한다. 그리고 이 이름들은 박연선의 작품 전반에 등장했다. <얼렁뚱땅 흥신소>보다 먼저 <파란만장 미스김 10억 만들기>에서 이미 주인공의 이름을 김은재, 박무열로 설정한 적이 있었고, 이후 <화이트 크리스마스>에서도 박무열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며, <난폭한 로맨스>에서도 박무열, 유은재가 또다시 등장했다. 물론 배역을 맡은 배우도, 인물 설정, 나이, 직업 등 모두 완벽하게 다른 인물들이었지만 이름은 언제나 동일했다.





그렇기에 박연선 작가를 조금이라도 알고 그녀의 작품을 조금이라도 사랑하는 이들이라면, <청춘시대>를 단 10초만 보고도, 등장인물의 이름 단 세 글자만 듣고도 그녀의 작품임을 유추하는 일이 그리 어려운 건 아니었다. 오히려 나로선 당연한 일이었다. ‘유은재’를 듣고도 박연선을 떠올리지 못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청춘시대>라는 작품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등장인물의 이름이 ‘유은재’라는 이유만으로, 박연선 작가가 썼다는 이유만으로. 대학 생활 중 겪게 되는 여자들의 시시한 사랑, 우정.. 뭐 그런 이야기일지도 모르는 드라마였지만, 박연선 작가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그녀라면 그리 단순한 작품을 쓸 리가 없었다. 이변은 없었다. <청춘시대>는 단숨에 인생 드라마가 되었다. 그녀의 힘은 여전했다. 등장인물의 이유 없는 현재와 행동은 없었다. 각자의 과거에 집요하게 파고들었고, 상처를 따뜻하게 어루만지는 손길도 여전했다.



여전히 얼굴만 봐도 눈물이 나는 윤선배



<청춘시대>를 보고 난 후, 오랜만에 <얼렁뚱땅 흥신소>를 정주행했다. 그리고 오래 잊고 있던 내 시나리오들이 떠올랐다. 한때 나도 누군가의 상처를 들여다본 적 있었다. 한 인물의 우주를 만들어 낸 다음 잔인하게 할퀴고 헤집어 놓아서 일어서지도 못할 정도로 만들어 두고, 그 상처를 봉합하며 내 과거를 치유했었다. 그땐 나도 박연선 작가처럼 나만의 이름을 가지고 싶었다. 그 이름이 아니면 작품이 나아가질 않는, 누구나 인물의 이름만 듣고도 나를 떠올릴 수 있을 만한 그런 이름을. 대본 쓰는 일을 그만두면서부터 더 이상 이름에 집착하지 않게 되었지만.


따지고 보면 가수나 제작자들이 노래의 맨 처음 시그니처 사운드를 넣는 것과 비슷한 결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다른 점이라면 시그니처 사운드는 그 자체의 역할로 역할을 다하지만, 박연선 작가의 이름들은 각자의 우주 같은 세계관을 지니고, 작품 전체가 굴러가도록 기능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이 아닐까. 이것도 결국 한두 해, 한두 작품으로 이루어진 일은 아닐 테다. 2004년 <파란만장 미스김 10억 만들기>부터 시작된 박연선 세계관이니, 무려 20년에 걸쳐 쌓아 올린 그녀만의 또 하나의 세계. 이번에도 역시 시간을 쌓는 일을 이기는 것은 아무것도 없단 사실을 절실히 느낀다.


약 2년 전 박연선 작가는 <날아올라라, 나비>라는 작품의 대본을 맡았다. 드라마는 촬영까지 마쳤음에도 출연 배우 한 명의 학폭 논란으로 결국 한국에선 방영될 수 없었다. 등장인물을 살펴보면,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박무열이 등장한다. 남자주인공은 아니지만, 여전히 그녀의 세계관에서 살아 숨 쉬는 걸 보며, 아직 박연선 작가가 건재하구나 안심했다. 앞으로도 그녀의 작품 속 무열과 은재를 계속해서 만날 수 있길 바란다. 언젠가 또 다시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은재와 무열을 만나고, 박연선 작가님의 작품을 알아보는 그런 마법 같은 순간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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