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새로운백년 Sep 25. 2023

민주를 이해한다면 나도 잘못된 걸까?

드라마 <너의 시간 속으로>

민주를 이해한다면 나도 잘못된 걸까?

드라마 <너의 시간 속으로>



**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니 아직 작품을 보기 전이라면 뒤로 가기를 눌러주세요


대만 드라마 <상견니>의 리메이크 작품인 <너의 시간 속으로>가 공개됐다. 생각보다 진도가 더디게 나가긴 했지만, 어쨌든 일주일 정도 걸려서 전편을 모두 봤다. 우연히 <상견니>를 보고 나쁘지 않았던 기억이 있었고, 특히나 <멜로가 체질> 이후로 전여빈이라는 배우에 대한 애정도가 높았기에 기대했던 작품이었다. 결론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정도긴 했다. 원작과 비교하거나 작품 자체의 평은 워낙 여기저기 많은 터라 여기서 말할 주제는 아니고, 나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드라마를 보는 내내 마음이 갔던 것은 ‘민주’였다. 시종일관 우중충한 표정에 바닥으로 내리깐 시선, 자신감없는 걸음걸이가 모두 신경 쓰였다. 남동생은 소심하고 답답한 누나를 무시하고, 엄마도 아빠도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는 민주보단 남동생의 안위를 우선한다.

학교에선 친구도 없이 투명인간처럼, 담임마저 그녀가 자신의 반이라는 사실을 모를 정도였다. 주위에 그녀를 지탱할 사람이라곤 단 한 명도 없었다. 오직 그녀가 아르바이트를 하던 가게의 사장인 삼촌 뿐이었지만, 그마저도 민주는 누군가에게 자신을 털어놓는 일에 무척 힘겨워 보였다. 삼촌에게도 자신의 아픔을 털어놓지 못하고, 모든 감정을 속으로 욱여 넣기만 했다. 매일 같이 느끼는 절망을 꾸역꾸역 속으로만 삼켰다.

준희가 민주의 몸 속으로 들어갔을 때 민주가 갇혔던 곳은, 아마도 그녀가 속으로 삭힌 감정들이 만들어낸 깊고 축축한 절망의 동굴이 아니었을까.


민주에게 세상은 가혹했다. 전생에 무슨 죄라도 진 사람처럼, 이번 생에 가중치로 벌을 주기로 작정한 것처럼. 그녀는 지독한 삶을 끝내고 싶어했다. 당연한 결과였다. 그 나이에 겪기엔 지나친 무관심이었다. 서른이 넘은 지금에도 쉽지 않은 세상인데, 민주는 아마 더욱 힘들었을 테다. 고작 그 정도로 삶을 포기하는 건 나약한 일이라고 누군가 말할 테지만, 똑같은 일 앞에서 사람들마다 버텨내는 능력치가 모두 다르다. 누군가는 대수롭지 않은 일에도 큰 파도를 만난 모래성처럼 흔적없이 흩어지곤 한다. 세상 모두가 단단한 삶을 살아가는 건 아니기에.

그럼에도 민주는 모두에게 잊혀지는 걸 원하지 않았다. 평생 투명인간 같았던 삶, 마지막이라도 기억되길 바랐다. 자신의 부재가 누구에게든지 영향을 끼치길 바랐다. 그래서 그녀는 살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자살은 쉽게 잊혀진다. 사람들은 그녀를 손가락질 할 테고, 금세 잠잠해질 터.

그렇지만 살해는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 수 있었다. 그런 식으로라도 그녀는 잊혀지고 싶지 않았다.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기억되어 본 적 없는 그녀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마지막이었다. 기억되고 싶어서 사라지길 원하는 그녀가 분명 정상은 아니다. 이토록 허황되고 어리석고 나약한 소리가 있을까. 그런데 만약 그녀의 말이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두 이해가 된다면, 나도 정상이 아니라서일까.

민주와 비슷한 생각을 한 적 있었다. 세상이 너무도 고달팠다. 나에겐 온갖 결핍과 불친절을 이겨낼 충분한 단단함이 없었다. 나약하다고 손가락질 받아도 어쩔 수 없었다. 손가락질 받을 수록 더 약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나약한 마음이 마지막을 꿈꿨었다. 그렇지만 쉽게 자살이라는 결론을 내릴 순 없었다. 우리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 것 같았다. 그런 식의 무책임한 마지막을 맞이할 순 없었다.

자살 대신 무슨 사고라도 당하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아니면 불치병에라도 걸릴 순 없을까. 어리석게도 계속해서 어디든 아프길 바랐다. 조금 이상한 말이지만 정당하게 죽어가고 싶었다. 누구든 납득할 수 있는 죽음. 남은 이들은 똑같이 슬프겠지만, 자살보다는 덜 자책하고 절망할 것 같았다.

지금은 시간이 많이 흘렀고, 나도 나름대로 뿌리를 깊게 내린 사람이 되어서 더는 이런 생각을 자주 하진 않지만, 완벽하게 지워지지도 않았다. 흉터는 남았다. 민주 같은 사람을 보면 자연스레 나의 과거를 떠올렸고, 그들의 마음도 완벽하게 이해했다. 때로 세상은, 누군가가 견뎌내기엔 지나치게 고달프고 버겁다.


철저히 민주의 입장에서 드라마를 봐서일까, 준희가 하는 위로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차피 잘 살고 있는 사람의 위로와 용기는 소용없다. 이런 게 자격지심일까. 그렇대도 어쩔 수 없다. 자격지심을 가지지 않고 그런 응원에 쉽게 힘이 날 것 같았으면, 애초에 죽음을 생각하지도 않았을 테다.

내가 믿은 건 오직 인규의 변함없는 사랑 뿐이었다. 인규가 가진 마음의 궁극적인 시작이 동정일지라도, 당장 민주에게 필요한 사랑이었다. 옆에 있어주고 얘기를 들어주고 매일 사랑받는 게 어떤 기분인지 알려줄 수 있는 인규의 애정.

드라마가 끝나고 남은 건 결국 사랑이었다. 민주에게 필요한 것도, 나아가 내게 필요한 것도 그리고 세상에 필요한 것도 모두 사랑이었다. 사랑이 부족한 세상을 살아간다. 사랑보단 혐오와 경계, 폭력이 더 익숙한 사회고, 나약한 이들은 더욱 더 쉽게 자신을 잃어버리는 세상이다. 인간성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며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생각했다. 세상의 모든 민주를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직접 손을 내밀 순 없어도 마음을 건네는 일에 대해 생각했다. 내가 나약한 시절을 이겨냈던 것도 마음 덕분이었다. 민주처럼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내게도 인규처럼 마음으로 다가온 이들이 있었다. 매일 안부를 물어주고 무너지지 않도록 잡아주는 마음. 내가 해야 할 것도 그런 마음을 나누는 일이지 않을까. 적어도 인간성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 같은 것들. 마음을 놓지 않고 있으면, 언젠가 민주 같은 이들을 발견했을 때 나도 마음을 나눌 수 있을 테다.




조금 다른 얘기지만… 결말에서 문득 궁금해졌다. 버스에서 시현은 준희를 보며 ‘권민주?’라고 불렀다. 시현과 인규가 여전히 친구라면, 인규와 민주가 여전히 함께라면 시현이 민주의 근황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민주는 더 이상 인규와 함께이지 않은 걸까 또는 시현이 인규와 더는 친구가 아닌 걸까. 해피엔딩인 듯했지만 묘하게 해피엔딩처럼 다가오지 않는 결말이었다. 시현과 준희보다는 인규와 민주의 결말이 궁금했다. 마음이 자꾸 쓰였고, 걱정하게 됐다. 그들의 현재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무엇보다 민주가 포기하지 않았기만을 바랄 뿐이다.


이전 09화 체리 맛 결핍을 맛보았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