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부터 한계에 다다랐다는 느낌을 받았다. 가슴이 답답했고 머리가 아팠고 기분이 침체되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잠도 오지 않았고 몸도 아팠다. 치유하지 못한 나의 상처들이 곪을 대로 곪아가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 풀어지지 않는 나쁜 기분들은 고스란히 내 아이들에게 옮겨갔다. 짜증 내고 화내고 후회하는 악순환의 고리... 때마침 친한 언니가 추천한 책 『아이가 버거운 엄마 엄마가 필요한 아이』를 가뭄에 단비처럼 만났다. 평소 같았으면 추천을 받아도 ‘나중에 읽어봐야지.’ 하고 넘기곤 했었는데 이 책은 바로 읽고 싶어져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각자 세 아이를 키우고 있는 우리는 이 책이 육아서인 줄만 알았다. 책장을 넘길수록 이 책이 일반 육아서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나의 아이로부터 자꾸 건드려지는 나의 상처와 결핍에 대한 이야기, 엄마의 내면아이를 끌어내는 심리치유서에 가까웠다. 이 책에서 작가는 아이에게 화가 나는 반복되는 그 상황을 면밀히 살펴보라고 말한다. 내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것은 절대 나를 자극하지 않는다면서 말이다. 한 예로 만화책을 읽는 아이가 보기 싫었던 어떤 엄마는, 무능한 아빠와 닮았다는 이유로 엄마의 미움을 받았던 어린 시절의 상처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엄마는 작가와 함께 어린 시절로 돌아가 아빠와 엄마에게 하고 싶은 말을 쏟아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무의식에 자리 잡은 나의 상처와 결핍을 직접 마주해야만 그것을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작가가 그렇게 변화와 성장을 이루었다고 한다.
사실 난 어린 시절의 상처들, 무의식에 자리 잡은 결핍들을 대부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이 내 아이들에게 대물림되고 있다는 것도. 다만 어떻게 치유해야 하는지,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를 잘 몰랐다. 심리치료를 받고 싶었지만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없었다. 나에게 쓰는 돈과 시간, 에너지가 아까웠다. 차라리 그 돈으로 아이들의 심리검사와 놀이치료를 선택하는 것이 마음이 편했다.
하지만 이제는 마주해야 했다. 막내를 재우고 딸아이 방으로 들어갔다. 엊그제 물건을 정리하지 않은 딸아이에게 서랍을 뒤집어엎고 화냈던 그 자리에 앉았다. 그때의 상황으로 돌아가 딸에게 퍼부었던 비난의 목소리를 냈다.
“엄마가 몇 번을 말해. 제발 정리 좀 하라고! 안 하니까 물건을 매번 잃어버리잖아. 한다고 한 게 이거야? 제대로 좀 하라고, 좀. 그냥 한 곳에 막 쑤셔 넣고 다 했어요? 어디에 뭐가 있는지 다시 찾지도 못하면서 이게 정리니? 이럴 거면 다 갖다 버려! 쓰레기장에 갖다 버리라고!”
그때 어린 시절 나의 엄마의 목소리가 겹쳐 들렸다. 눈물이 쏟아졌다. 난 말했다.
“엄마, 나 이제 8살이야. 아무리 치워도 엄마처럼 잘하지 못해. 치우다가 내가 좋아하는 인형을 보면 또 놀고 싶어져. 그래도 꾹 참고 치우면 엄마는 칭찬 한 번을 안 해줬어. 엄마가 피곤한 게 나 때문이야? 엄마 삶이 고달픈 게 나 때문이냐고! 나중에는 학교 갔다 돌아와서 하루종일 집만 치웠어. 그러다가 그릇이라도 깨면 지랄지랄. 내가 열심히 한 건 하나도 안 보여? 어디 다친데 없냐고 물어보는 게 먼저 아니야? 그래, 다 필요 없고 그냥 웃으면서 들어오라고, 좀. 밖에서는 세상 밝은 척, 세상 착한 척하면서 집에 와서는 왜 짜증에 면박인데! 왜 나를 엄마 삶에 무거운 짐처럼 느끼게 하는 건데! 내가 얼마나 더 열심히 치워야 날 보고 웃어줄 건데! 나도 막 어지럽히면서 놀고 싶다고!”
잠이 밀려왔다. 쏟아낸 눈물, 콧물, 곪은 상처를 깨끗이 닦아내고 막내 옆에 조심스레 누워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