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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abica Duck Jan 25. 2021

1월 3주 차

고안하다 : 연구하여 새로운 안을 생각해 내다.

 사람의 겉과 속을 다 보고서야 그 사람을 진정 안다 할 수 있듯, 고안이란 단어를 사용하기에 앞서 고안에 대한 속 깊은 고찰이 필요하다.

‘연구하여 새로운 안을 생각해 내다.’

연구란 ‘깊이 있게 조사하고 생각해 진리를 밝히는 것’. 연구의 끝에 진리가 있다는 것 또 진리는 스스로 존재함에도 연구의 결과물이라는 표현이 놀랍다. 과학의 시대를 살아가는 연구자 중 연구의 목적지가 진리라는 것을 아는 혹은 기억하는 이는 얼마나 될까. 지하철을 타고 내리기 반복하면 어느새 들어도 듣지 못하고 타고 내리는 습관이 생기듯 연구자들 역시 반복적인 연구의 덩어리가 불어 진리를 잊은 채 그저, 연구하는 것은 아닐까. 나의 작은 오해일 수 있지만, ‘연구 성과가 진리였던 적이 있었나’에서 출발한 나의 의문이다.


 남을 깎아내리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노파심에 두둔한다. 내가 달아놓은 물음은 ‘진리란 무엇인가’ 다. 첫째로, 진리는 보편타당한 법칙이다. ‘깊게’ 들어가면, 특별함 없이 사리에 맞아 타당하다는 의미고, 조금 더 깊게 가면 사물의 이치, 즉 앞뒤가 들어맞음, 에 맞아 타당하다는 의미다. 깊게 깊게 들어왔지만 쉽게 말해 절대적 진리, 인식 속 진리다. 두 번째 뜻으로는 ‘논리의 법칙에 일치하는 지식’이다. 진리에 대한 전자의 뜻과 후자의 뜻은 비슷한 뉘앙스지만 같은 의미가 아니다. 전자가 내세우는 사자가(어흥) 영원불변이라면, 가변 가능은 후자의 사자일 것이다. 천동설이 지동설로 바뀌고, 명왕성이 행성에서 왜행성으로 바뀌는 것처럼, 언젠가 논리 속에 지지를 업고 있던 무엇이 새로운 논리 속에서 지지를 잃는 것이다. 사실 연구자들이 늘 좇고 있는 진리란 지금의 흐름 속에서 진리이지, 영원불변의 진리가 아닌 것이다.


 ‘고안하다’라는 단어를 두고 일주일을 고민하면서 내가 고안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봤다. 고안을, 연구에 그친 것/ 안으로만 존재한 것/ 고안하게 된 것으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 같다.

안은 많다.

가령, 건물의 디자인이 비슷해 보여도 다 다르다는 것

가령, 한계와 부족은 다르다는 것. 한계는 끝을 두지만, 부족은 끝이 없다

가령, 마음속 꽃밭에 꽃을 잔뜩 심고 싶은데 그건 대나무라는 것

이 외에도 끊이지 않는 무결의 삶에서 어디선가 작은 부분 부분이 날아와 균열을 내며 불협화음을 일으키는 날들이 있다. 대개의 경우 그 불협화음을 불편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저 내 삶의 일부인 양 받고 넘겨버리는 우둔함이 나에게는 있다. 또 한 편으로는 안들이 연구까지 나아갈 것 없을 시작점이자 끝점이기도 하다.


 천성이 게으르고, 집중을 못한다. 생각의 가지가 너무 많아 정돈이 안되고 점점 널브러져 내 몸으로 끌어안기 힘들어 전부 베어버린 것들이 많다. 가지 하나하나 파고들면 끝 모를 벅차오름이 생각만으로도 넘쳐 더 넓어지기 전에 끊어내 버린다. 이것들을 기억하고 기록했어도 글이 지금보다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넘쳤을 것이다. 어쩌면 나의 천성은 나를 가로막는 것이 아니라 옥죄지 않아 살게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미 깊게 파고든 생각은 자를 수 없다. 어떤 글을 읽고는 왠지 내 이야기 같다는 마음에 몇 번이고 읽었다. 글에 쓰인 마음을 처음 읽고 나서부터는 딱딱한 분석을 시작했다. 각 문장을 분석하고 나에게 맞게 해석을 했다. 글쓴이 없는 저의는 없고 물어 알아내야 연구에서 고안으로 나아갈 수 있다. 나는 용기를 내지 못하고 쭈뻣쭈뻣 거리다 나 중심 해석에 이마 시릴 대오를 느끼고서야 연구가 쭈굴쭈굴해졌다. 결론도 없고 안도 없는, 연구만 남은 이런 생각이 기억 속 서랍의 뒤적임 끝에 나온 한 이야기다. 찾은 내가 용할 만큼 잘라 놓은 가지뿐이다.


 무엇인가 시작해 끝을 보지 못하는 성격이지만 독서 외에도 끝을 본 것들이 있다. 생각할수록 미천해 이렇게 이루어내 놓은 것이 없는 내가 겨우 찾아낸 것이 여행, 사진, 글이다. 나의 미지로의 전진 속에는 불안보다는 흥미나 흥분이 있어 걱정을 도려낸다. 도려낸 자리에 피어나는 행복은 문화를 접하며 눈에 띄게 자라나고 나는 결국 그 향에 중독되었다. 유럽으로의 첫 여행은 동경과 환상의 실재로 이어지고, 일상이 아니길 바라는 일상에서 살아있을 힘을 줬다. 자발적 인내를 배우고, 그 대가로는 새로운 문화로 끝없이 나아감이라는 축복을 하늘로부터 받았다. 꿈을 알고 꿈에 집착하면서, 실제화를 위한 방편들을 모색하게 되었다. 여행 속 나의 활동에 어디서 즐거움이 오고 그 즐거움을 어떻게 꿈에 그리던 여행을 삶으로 연결할 수 있을지에 대한 연구를 하게 됐다.


 여행을 시작할 때부터 기록을 남겼다. ‘남는 것은 사진이다.’ 같은 보편적 생각에서 출발했지만, 사진은 그 속에 더한 매력을 지녔음을 이내 깨달았다. 러시아에서 해질녘을 찍기 위해 3시간가량 앉아 기다리며 보내는 시간이 너무 편안했다. 어쩌면 그 당시 한국어를 배우신 아이의 어머니와의 대화가 기다림에 온정을 불어넣었을지도 모르겠다. 또 항구에서 그림 그리던 소년과의 힘겨운 의사소통(대단한 구글, 세계화의 앞장선 자) 끝에 찍은 사진이 사진 찍기라는 행위에 애정을 더했을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23살 러시아에서 나는 사진에 진지해지자고 결심했다.(진정 진지해진 것은 몇 년 더 걸렸지만 말이다.) 찍은 사진을 보정하고, 분류하고 어떤 식으로 해야 내 사진을 드러낼 수 있는지에 대한 연구는 매번 진행된다. 비록 사진 찍는 삶은 아직 진행 중이어도 찍은 사진들은 늘 연구 끝에 이것이 나의 사진이라고 살살 명함을 내밀고 있다.


 몇 번 여행기를 쓰면서 글과 안면을 틔었다. 당시에는 서먹해 금방 헤어져버렸지만, 작은 연이 아직까지 이어진다. 처음 대만을 갔을 때, 대만이 내게 준 이미지가 너무 친근해 한 번 더 갔다. 두 번째 갈 당시는 이미 사진과 사뭇 진지한 관계였기 때문에 시작부터 대만을 더 느끼기 위한 노력을 했다. 더 현지인에 가까워지려는 노력을 하고 한 껏 느낀 것을 사진 안에 담고, 글 속에 쏟아냈다. ‘What Is TaiPei’라는 나의 첫 노트가 24살에 쓰이고 이후로도 틈이 날 때 글을 쓰고 고쳤다. 글 역시 사진과 함께 꽤 진지한 관계에 돌입해 나-여행-사진-글이라는 관계가 형성되었다. 여행 가지 않아도 사진을 찍고 보정하듯, 매일 일기를 쓰고, 단상, 독후감, 회고 등의 글을 쓰고 퇴고함으로 연구하고 더 나음으로 만들어 여행자로 방편을 척척 마련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새로운 안을 제안하면, 결국은 여행이다. 지금까지 적은 모든 이야기는 각각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만 나라는 사람의 연구의 일부다. 나의 중심은 나의 재미와 꿈, 즐거움과 행복이고 이에 대해 연구하고, 연구한 것을 안으로 나아가 하려고 한다. 세계 여행을 꿈꾼다. 세계 여행을 위해 사진과 글을 계속 연구하며 또 여행 계획을 짜고 있다. 오직 여행. 여행 속 내가 누리는 모든 즐거움은 나의 연구 대상이 되어 나의 속을 채워줄 동반자가 될 것이다.


 살면서 고안과 어울리는 적이 있었을까. 고급진 표현인 고안은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내 삶을 되돌아보면서 내 생각보다 내가 더 나은 사람인 것 같기도 하다. 그럼에도 늘 부족한 이 빈자리는 무엇일까. 언제쯤 나의 고안이 내가 인정해 당당함으로 그 빈 곳을 채워 나를 완성시켜줄까. 나의 노력의 시간과 땀 흘리는 멍 때림과 아지랑이 피는 생각의 열기가 계속되어 자인된 고안으로 만들어주기를 소망하며, 그 고안이 나를 완성시키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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