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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abica Duck Mar 08. 2021

2월 4주 차

기다리다 : 어떤 사람이나 때가 오기를 바라다

 유형과 무형이라 함은 시각적으로 가늠할 수 있는가에서 시작한다. 가시성이라는 뿌리에서 시작된 차이는 줄기로, 가지로, 잎으로 가면서 커진다. 유형과 무형은 각각 개성을 갖고 존재하지만 꼬여 합쳐있기도 한다. 

똑같이 흔하고 똑같이 드물어도 유형과 무형이 주는 포만감은 다르다. 유형의 한 예로 달을 생각해보자. 매일 밤 뜨는 달을 볼 때 느끼는 포만감은 일정하다. 간혹 며칠을 거르고 달을 보게 될 때는 포만감이 더 크다. 가시성에서 시작한 유형의 경우 포만감이 클 수 있지만 순간적이다. 시야에 들어온 대상이 익숙해질수록 공급되는 포만감은 작아진다. 무형의 한 예로는 대화를 생각해보자. 대화는 대상에 따라 포만감이 다르지만 대체로 포만감이 크다. 더불어 좋아하는 대상과의 대화가 오랜 시간 끝에 찾아올 때는 포만감이 배가 된다. 비가시성의 무형은 마음이 오고 가는 과정에서 서로 비벼지고 그만큼 달아올라 포만감이 크다. 또한 무형의 경우 유형과 달리 농익을수록 포만감이 점점 커지며 유형이 주는 포만감보다 더 길게 유지되는 경향이 있다. 달이 시야에서 벗어나면 갖고 있던 포만감을 잊는 반면, 대화는 곱씹을수록 포만감이 유지된다. 유형은 눈에 보여 내 눈을 시원하게 해 줄지라도 무형은 마음을 가득 채우는 넉넉함을 지녔다. 

유형과 무형이 섞인 것을 생각하면 시각적인 시원함과 마음의 풍족함을 둘 다 누릴 수 있다. 마음이 담긴 글, 이를테면 손편지를 생각해보면 되겠다. 손편지의 시각적 포만감과 그 안에 담겨있는 마음의 포만감이 더해져, 각각의 강점들이 더해져 크고, 길게 이어진다.


 매일 뜨는 달처럼 규칙적인 반복성을 가진 유형의 것이나 늘 하면서 늘 하지는 않는 불규칙적인 반복성을 지닌 대화 같은 무형의 것이나 공통적으로 기다림이 필요하다. 달은 매일 뜨지만 항상 뜨지는 않기 때문에(예를 들어 낮에는 보기 힘들다) 달을 보기 위해서는 정해진 시간까지 기다릴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바람이 바람 타고 대상에 닿을 때까지 우리는 인내해야 한다. 인내는 속에서 펄펄 끓고 있을지라도 겉에서 보기에는 잔잔한 호수 같다. 기다리는 이의 모습은 대상이나 때와 당장 어우러져 있지 않을지라도 그것만으로 이미 아름답다. 달을 기다리는, 애인을 기다리는, 편지를 기다리는 이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상상해봐라. 파리 센느 강 벤치에 앉아 왼쪽으로는 에펠탑이 저 멀리 보이고 오른쪽으로는 달 뜨는 것을 기다리고 있는 이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혹은 직장이 끝난 애인을 회사 앞에서 기다리는 이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또 답장을 기다리며 우체부가 답장을 언제 가지고 올지 기다리는 이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유형이든, 무형이든, 무형이 담긴 유형이든 기다리는 이의 모습은 세상이 때를 묻혀도 더러워지지 않는 아름다움이 있다.


 세상이 아무리 때를 묻혀도 더러워지지 않을지언정 스스로 무너져버려 미를 잃을 수도 있다. 때가 오기까지 인내하지 못하고 폭발해버리는 경우도 심심찮게 보인다. 구름 껴 달을 며칠 째 보지 못해 하늘을 향해 온갖 저주를 퍼붓는 이의 모습, 연락하기로 하고는 연락 오지 않음에 혼자 또 애인에게 짜증 내는 모습 또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편지에 좌절하고는 편지를 찢으며 울부짖는 이의 모습 속에는 추가 담겨있다. 하지만 이는 기다림의 추가 아니라 기다리는 이의 추인만큼, 기다림 만큼은 여전한 아름다움만을 지녔다.


 한편 기다린다는 것 역시 무형의 것이다. 혹은 기다림이라는 무형을 지닌 유형이다. 무형의 것들이 비시각성이라는 근본적인 뿌리에서 출발했을지라도 다 같지는 않다. 뿌리에서 출발해도 나무의 열매가 모두 단 것은 아닌 것처럼 기다림은 아름다움을 지녔지만, 이를테면 짜증, 증오는, 추만 지닌 것도 있는 것이다. 인간의 특수성은 미도, 추도 선택적으로 따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기왕 우리 마음이 추나 미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이라면 우리가 때 묻지 않은 미를 품고 때가 올 때까지 인내하여 추는 멀리할 수 있는 그런 존재가 되는 날을 나는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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