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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abica Duck Aug 02. 2021

7월 2주 차

사색하다 : 어떤 것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고 이치를 따지다

사색하다

 창조의 쾌가 쌓일수록 소민 마음 어디에서 작은 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내가 그린 그림은 기억 속 고흐의 그림과 같은가.' 비교는 대체로 불행의 시발점이지만 열등을 먹고사는 존재는 비교를 발전의 시발점으로 삼는다. 소민은 들려오는 소리를 양식으로 삼아, 점점 흐릿해져 가는 그림을 어떻게 구현할 수 있을지 연구하기 시작했다. 어른이야 인터넷이나 책에 있는 설명을 읽으며 따라 할 수 있지만, 4살 아이에게 인터넷이란 화면의 이미지를 터치하는 것에 불과해 글 읽기는 할 줄 모를뿐더러 책에 그런 내용이 있음을 알지도 못했다. 아이에게 책이란 인어공주나 백설공주 같은 동화 속의 이야기에 불과해 소민은 현실과 밀접한 것이 엘레느나 로랑이 읽어주던 책이란 것 속에 있을거라 생각해본 적 없었다. 엘레느는 소민이 애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봤는데, 종종 울상이 되고, 떼쓰는 모습에 피곤해도 이는 태어났을 때부터 인간이 지니는 태생적인 몸부림이니, 자신은 소민이 성장할 수 있도록 최대한의 자유를, 사실은 엘레느 손바닥 위 자유지만, 줬다고 믿었으며 소민의 모습은 나비로 변태 하려는 애벌레의 몸부림 같은 처절함과 간절함을 담고 있어 결국은 이겨낼 것이라 믿었다. 한 편으로는 함부로 건드렸다 잘못될 것을 우려하기도 했고 위험하지 않다면 마음대로 하면서 배우는 것이 많다고 믿기도 했다. 그림뿐 아니라 엘레느와 로랑은 소민이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도록 했는데, 때로는 남에게 피해를 입혀 곤혹스러운 때도 있었지만, 대체로는 소민 스스로 잘못됨을 알고 조금씩 고치며 나아졌다. 그런 관점에서 그들의 교육 방식은 최소한 소민에게 효과가 있었고, 이는 양육 전 책, 지인, 전문가의 조언 등의 정보를 모아 만든 그들의 교육 관념의 결실이었다. 

엘레느는 소민의 그림을 보며 4살이 그릴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며 소민의 친부모가 예술계 종사자 피를 갖고 있을 것이란 짐작, 신이 소민에게 재능을 주었다는 기쁨, 소민은 천재라는 희망 섞인 판단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매일같이 그리기를 좋아하는 소민을 바라볼 때는 소민이 재능을 갖췄을 뿐 아니라 노력마저 하고 있으니 성공할 것을 일찌감치 예감했다. 

소민은 늘 그래 왔듯 포기할 줄 모르고 이렇게, 저렇게 시도했지만 오르세 미술관에서 봤던 그림에 도통 가까워지지 않으면서 매일 같은 실패에 지치기 시작했다. 천재도, 실제로 천재든 아니든, 난관은 있기 마련인데 소민의 첫 난관이 바로 표현의 한계이자 무수한 실패를 겪고도 일어서는 것이었다. 자신의 솜씨 이상을 탐하는 눈은 자신의 한계 앞에서 포기하지 않고 무엇이든 알고 있다고 믿는 양모 엘레느에게 향했다. 엘레느는 한 편으로는 소민이 잘하고 있다며 격려하고, 잘 모르겠다면 무작정 그리지 않고 생각해볼 것을 권했는데 그녀의 말에는 스스로 답을 찾길 바라는 어조가 묻어 있었지만, 그 이면에는 엘레느도 당장은 무지해 답할 시간이 필요했다. 엘레느에게 별이 빛나는 밤에는 인상파 화가 고흐의 그림에 불과했기 때문에 엘레느 역시 어떻게 그리는지, 왜 그렇게 그렸는지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다 괜찮을 것이라는 미소 옆 무지는 나이에서 오는 지혜로 가려 어린 소민은 겉에 드러난 표정만 보고 알겠다고 했다. 엘레느는 인터넷에서 별이 빛나는 밤에 그림을 찾아 소민에게 보여주며 그림을 보며 탐구해보라 조언했다.

4살 아이가 생각을 하는가에는 의문이 생기기 마련인데 아이의 장점이자 단점은 바로 들이대는 것이다. 소민에게 가만히 보며 생각하는 것은 쉽지 않아 컴퓨터 화면을 만져보고 흔들어보다가도 또 바라보며 나름의 생각을 했다.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이라 하면 머릿속에 떠돌거나 보이지 않는 것을 잡기 위해 외부의 자신은 가만히 둔 채로 내면에 집중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아이가 보이는 행동은 무엇일까. 가만히 있지 않고 계속 움직인다면, 기존의 여러 시도를 하며 그림 그릴 때와 다른 것이 무엇일까라고 엘레느는 소민을 보며 생각했다. 소민을 한참 바라보던 엘레느가 되려 사색에 빠져 자신의 정의가 흔들림을 느꼈다. 엘레느는 자신의 닫히고 편협한 세계를 반성하며 그간 믿어왔던 세월의 정의 위에 소민이 보여주는 모습도 생각이라고 덮어썼다. 소민을 바라보며 얽매이지 않은 아이가 누리는 자유에 부러움을 느끼며 소민에게 같이 생각해보자고 했다. 별이 빛나는 밤에는 어떻게 보이는지, 직접 그림을 만진다면 어떤 느낌일지, 소민이 그렇게 그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그려야 할지 그리고 한 번 그렇게 그리기까지. 소민은 가만히 생각하는 법을 배우고, 엘레느는 움직이는 법을 배우는 서로가 서로의 선생이 되는 그런 시간이었다. 

난관을 돌파하는 방법은 홀로 모든 것을 껴안고 한 점 돌파하는 방법도 있지만, 주위의 조력자와 함께 해결해 나갈 수도 있다. 모든 것을 혼자 짊어지는 것은 외롭고 언제나 올바르거나 맞는 길이 아니다. 사람은 사회 속에서 살아가며 사회를 이룬다는 것은 함께한다는 것이다. 누군가 소민은 버려졌다고 말할지라도 소민은 결코 외로운 존재가 아니며, 자신의 재능을 펼치고 한계를 이겨낼 수 있도록 함께하는 이들이 있었다.


 아이들 사이에서 그림을 잘 그리거나 말을 잘하는 것은 우월감의 수단으로 사용되지 않지만 부모 사이에서는 왠지 모를 자랑스러움과 함께 칭찬으로 우월감이 치솟곤 한다. ‘소민에게 생각해보라고 새로운 방법을 알려줘 봤어요.’ ‘어머 벌써 그렇게 생각이 깊어요?’ ‘아뇨, 그냥 이렇게 해보자 했지, 진전은 없는걸요.’ ‘그래도 저 어린 나이에 그림도 잘 그리는데, 소민은 정말 재능 있는 것 같아요.’ ‘에이 무슨, 재능이 있으면 좋겠다 생각해요, 그렇지만 소피는 벌써 글을 읽는다면서요.’ ‘소피는 그림 그리기보다 글자 배우는 게 더 좋나 봐요. 그래도 매일 배우려고 해요.’ ‘우리 애들이지만 참 잘 크고 있어 다행이에요.’ ‘그러게요 호호호.’ 

물론 아이들은 그러나 저러나 잘 지냈다. 소민은 엘레느에게 들은 방법을 소피에게도 소개하며 함께 고민도 했는데 소피에게도 조용히 관찰하는 것은 여간 쉽지 않았다.

‘소민, 이렇게 하면 알 수 있는 거 맞아?’ ‘나도 몰라, 엘레느가 알려준 방법이니까 해보고 있어.’ ‘소민 우리 그냥 나가 놀자.’ ‘이거 조금만 더 하다가...나가 놀자 그냥.’ 결국 아이들은 눈앞의 즐거움만 따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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