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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abica Duck Sep 13. 2021

8월 4주 차

실험하다 : 새로운 방법이나 형식을 사용해 보다.


 소민에게는 스케치북과 펜만 있으면 더는 바라거나 필요할 것 없는 인생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조금의 돈으로도 생활할 수 있지만 돈이 많으면 더 많고 다양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처럼, 때로는 필요가 모든 것이 아니고 필요 이상이 필요한 법이기도 하다. 아직 소민은 어리고 그녀를 평생 지켜줄 것만 같은 부모가 있지만, 언젠가는 소민은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어야 하는 때가 올 것이다. 그때도 소민은 스케치북과 펜만 있으면 더 바라는 것이 없을까. 그렇지만 이는 미래 일이고 10살의 소민은 새로운 것을 접하며 새로운 욕구를 하나씩 키워갈 나이였다.


 소민의 가정에는 TV가 없고 거실 벽면이 책장으로 채워져 있었다. 로랑과 엘레느는 TV를 잘 보지 않고 책 읽는 것을 좋아해 거실의 책장을 매달 책방에서 산 책으로 채우는 재미를 느끼고 있었다. 매달 한 권씩 책을 사 각자 2주씩 읽으며 이에 대해 이야기했다. 한 편으로는 건전하고 건설적이면서 한 편으로는 그들이 서로 너무 잘 맞고 어울린다는 것을 보여주는 취미활동이었다. 그들이 소민을 입양하고 나서는 소민의 방에도 책장을 놓아 소민에게 책을 읽어주기도 하고 글자를 가르치면서 독서 습관을 들이려고도 했는데, 그들의 사랑으로 자라지만 그들의 사랑으로 난 아이가 아닌 소민은 결코 책은 즐길 것이 아니라 꼭 해야 하는 숙제로 책장에 꽂혀있었다. 소민이 그림에 관심을 보이고 난 이후 책은 읽는 게 아닌 책의 표지나 속의 일러스트를 보는 정도로 변했다. 어른인 로랑과 엘레느는 집에 TV가 없어도 핸드폰이나 컴퓨터 또 이웃이나 직장동료 같은 대체 매체를 통해 정보 습득을 하고 기술, 생각, 시대의 흐름에 뒤처지지 않았지만, 소민은 TV 없는 세상, 아니 TV 있는 세상은 생각해본 적도 없었고 정보, 기술, 생각이란 몇 발 늦게 흘러와 남들에게는 일상이 되어 큰 의미를 갖지 못할 즈음이 돼서야 새로 접하곤 놀라며 즐거워해 주변 친구들에게는 웃음거리가 되었다. 소민이 TV를 비롯한 전자기기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은 부모의 성향도 있지만 그보다 부모의 결정에 의한 것이었다. 뉴스는 대부분 불행한 소식을 전달하고 쇼나 드라마는 순간적인 재미 이상을 주지 못하고 되려 소민에게 안 좋은 영향을 준다는 생각에 부부는 소민을 해로운 것으로부터 멀어지고 상상을 키우고 평생 도움이 될 책을 읽도록 유도한 것이다. 소민이 세상의 악과 부정적인 영향에서 멀든 그렇지 않든 학교에 가보니 혼자만 뒤쳐져 있는 것은 확실했다. 그나마 소민이 학교에 다니면서 디지털 기기나 세계에 친숙해지면서 그 격차를 줄일 수 있었다.


 하루는 소피의 집에 놀러 갔다 소민은 놀랐다. 아이패드는 이미 삶을 장악해 아날로그적인 모든 신호를 디지털적으로 바꿨다. 잡스가 아이폰을 출시하기 전, 빌 게이츠가 윈도우를 배포한 이후 인터넷이 등장하면서 이미 아날로그는 디지털로 변화하고 있었다. 초기 디지털은 아날로그와 평행 세계이면서 이세계로 존재해왔지만 눈 깜짝할 새 이세계는 평행이던 방향을 틀고는 우리의 세계 깊숙이 침투했다. 소피는 책 읽기, 숙제하기, 취미까지 모든 것을 아이패드가 보여주는 디지털 세상에서 행하고 있었고, 디지털 세상에서의 시간은 이미 24시간이라는 아날로그적 시간의 반 가량을 차지하고 있었다. 소민은 이 모습을 보고는 놀랐는데 사실 그보다는 아이패드로 손쉽게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이 더 놀라웠다. 소피는 아이패드로 할 수 있는 것을 하나하나 보여주면서 입 다물지 못하는 소민을 보고 좋아했지만, 소민의 귀에는 한쪽으로 들어온 말들이 그대로 반대쪽으로 나갔고 그보다는 자신이 지금까지 늘 시도하던 기법과 해보지 못한 기법 그리고 해보고 싶었던 기법들을 디지털 세상에서 손쉬이 할 수 있음에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소피와 한참을 놀고 나서 소민은 집으로 돌아와 자신도 아이패드를 갖고 싶다며 디지털이 보여주던 세상을 아날로그적인 몸짓과 말로 표현했다. 시대의 흐름에 대한 순응과, 아이의 바람에 대한 응답은 모두 아이패드 구입으로 이어졌고 소민 역시 자신의 시간을 디지털에 할애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소민의 눈은 그림 그리기에 쏟아져 도화지에 쏟던 시선을 일부 디지털 화면 위에 흩뿌리며 그림을 그렸다. 소민의 마음에 들었던 것은 색칠이었다. 이제 소민은 보다 쉽게 다양한 표현 방식을 택할 수 있었고, 전보다 쉬이 완성작을 만들 수 있었다. 쉬운 길을 찾았고 시대의 흐름에 올라탔지만 소민은 여전히 도화지를 놓지 않았는데 이는 그녀를 그림의 세상에 끌고 온 그 캔버스에 대한 애정이자 미련이었으며 디지털로 해낸 것을 아날로그로도 해내고 만다는 의지이기도 했다. 이제 소민은 전보다 더 쉽게 그림을 그릴 수 있었으며, 물론 종이 절약도 가능해졌다, 자신의 난관 앞에서도 더 생각하며 붓질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이 디지털 덕분임은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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