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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abica Duck Oct 25. 2021

10월 1주 차

연구하다 :어떤 일이나 사물에 대하여 깊이 있게 생각하여 진리를 따져보다

 엘레느는 결과를  받은 후 소민과 로랑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막막했다. 가족 앞에서 울음을 섣불리 보일 수 없어 며칠 울음을 삼켰다. 소민에게 말해야겠다 결심을 한 날 아침 웃으며 아침을 먹는 소민의 모습에 등교 전 웃고 있는 아이에게 차마 말을 할 수 없어 입을 열지 못했다. 소민은 여전히 학교를 지루해했다. 그럼에도 매일 아침 웃을 수 있던 이유는 로랑 덕분이었다. 엘레느가 그랬듯 소민 역시 로랑의 타고난 긍정성에 빠져 늘 웃으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소민이 학교 간 시간 로랑이 엘레느에게 건강검진 결과를 들었을 때 엘레느를 바라보던 로랑의 얼굴에는 미소가 있었다. 자신이 한 말을 주워 담지 못하는 죄책감에 얼굴을 손으로 가린 엘레느는 보지 못했지만 그 웃음은 로랑이 어느 때나 짓는 웃음과는 달랐다. 미소 옆 조그마하게 파인 보조개에는 로랑의 눈물이, 로랑의 암울함이 담겨있었다. 이별, 로랑은 엘레느와 죽을 때까지 함께 하기로 한 사이로 세상이 줄 모든 시련을 로랑 홀로 겪더라도 엘레느 옆에 있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엘레느가 누구도 동행하지 못하는 괴로움과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는 이야기는 자신의 다짐과 맹세를 무너뜨리는 쓰나미와 같았다. 이 시련 앞에서는 어떤 희망도 무력했다. 희망을 잃은 이에게는 희망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엘레느는 자신의 죄책감에 로랑의 걱정을 함께 짊어지고자 로랑을 안으며 걱정하지 말라는 껍데기의 위로를 건넸고 힘없는 껍데기를 마음속에 꼭 안은채 로랑은 눈물을 흘렸다. 그들의 포옹은 하나의 물방울이 되어 나무 식탁 위에 조용한 파장을 일었다.


 학교를 마치고 온 소민은 엘레느가 말 붙일 새도 없이 디 레지 활동을 위해 나갔다.(소민은 여전히 아무것도 몰랐기에) 소민이 오기 10분 전부터 마음을 잡으며 소민에게 뗄 운을 고민하던 엘레느는 소민이 연 문 소리에 바짝 긴장해 나갈 짐을 챙기는 소민에게 한 마디도 던지지 못하고 소민만 물끄러미 쳐다봤다.


 소민이 디 레지 멤버들과 헤어져 집으로 오는 길 엘레느는 공원 벤치에 앉아 있었다. 날이 추웠지만 엘레느는 소민에게 말을 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벤치에 앉아 있었다. 집에서 하염없이 울다 정작 소민에게는 말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소민이 돌아오다 본 가로등 불빛 아래 홀로 앉아있는 엘레느의 모습은 인간이 살면서 한 번쯤은 가져볼 깊은 낙담, 고민, 좌절을 보여주고 있었다. 불 켜진 가로등의 불빛을 타고 살랑살랑 흔들며 내려오는 눈송이,  벤치 옆 어린아이가 만들었을 법한 작은 눈사람, 그 옆에 눈의 위로를 받는 듯한 엘레느의 모습. 소민에게는 그림으로 남길 수밖에 없는 조우였고 엘레느에게는 소민에게 말해야 할 운명적 장소였다.


 소민의 세상에 처음 죽음이 깃들었다. 아프면 학교를 가지 못하고나 일을 하지 못하고, 놀지 못해 누워서 시간을 보내야 하지만, 그럼에도 다시 움직이고 사람을 만나며 그림을 그릴 수 있다. 그렇지만 죽음은 훨씬 고약해 그 악취만으로 세상과 자신이 멀어지게 하며 자신은 깜깜한 곳에서 어느 것도 보고, 느끼고, 맡고, 만지지도 못하는 영겁의 미지에 빠진다. 어린아이들이 사뭇 그렇듯, 누군가와의 이별이란, 더 나아가 미래란 그들에게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아이들은 오직 지금만을 생각하며 살아간다. 소민은 한 번도 엘레느를 못 보는 날에 대해 생각해본 적 없었다. 아이의 울음은 소리를 듣는 이와 이어져 자신을 알아주고 찾아달라는 표현인데 아무리 울어도 죽음 앞에서 더는 이어질 수 없다는 사실에 소민은 이미 죽음을 맞이한 듯 더 울었다.

벤치에 나란히 앉은 소민은 엘레느의 눈을 바라봤다. 죽음을 앞에 둔 눈은 멍 때리다가도 사라지는 생기를 억지로 붙잡으려 하는 강인함이 있었다. 빨갛게 달아오른 코에는 추위나 병에도 시들지 않는 오똑함이 있었다. 갈라진 입술에는 영원한 이별은 없을 것이라는 초연한 붉은빛이 돌았다. 엘레느는 가만히 소민을 한참 바라보다 ‘소민은 엄마를 잊지 않을 거지? 소민이 잊지 않으면 엄마도 소민을 늘 지켜줄 거야’라고 말했다. 엘레느의 얼굴과 말에서 소민은 사람의 죽음은 마음이 무너지는 것에서 시작됨을 느꼈다. 소민은 엘레느에게 얼마나 살 수 있는지 물었고 엘레느는 그건 아무도 모른다고 답했다. 곧이란 단어는 상대적인 것이니 우리는 곧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언제일지 모를 곧을 영원으로 생각하고 살아가야 한다고 엘레느가 소민에게 말해줬다.


 엘레느가 언제 떠날지 모르기에 소민은 엘레느에게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학교는 물론 매일같이 함께하던 디 레지 활동까지 가지 않고 엘레느와 함께하려 했다. 이에 감동을 받았는지 매일같이 약해지는 자신에게 다가올 죽음을 막아내느라 총력을 다해서인지 엘레느는 그저 웃으며 소민을 안아줬고, 옆에 있던 로랑은 오버스럽게 이들의 포옹 사이에 끼며, 상당히 로랑다운 행동이었다, 소민에게 학교는 가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다만 디 레지도 아닌 학교를 가야 하는 것은 소민에게 더 큰 괴로움이었다.


 학교를 다녀온 소민은 도착하자마자 엘레느를 찾았다. 소민은 집에 오면 늘 엘레느가 지나간 자리를 따라다니며 엘레느가 했던 동작을 따라 했다. 엘레느가 지나간 카펫 발자국, 도마 위 엘레느의 칼질 흔적, 앞치마 묶어 해진 자국, 냉장고에 든 때, 누렇게 변색된 책, 엘레느는 매일같이 로랑과 소민이 흔적 남긴 곳을 정리하며 자신의 흔적을 남겨놓았다는 것을 소민은 엘레느를 따라 하면서 알게 되었다. 아픔은 아프고 이별은 다가온다. 엘레느는 자신을 똑같이 따라 하는 소민이 사랑스럽다가도 다가올 운명을 거부하고 싶은 마음만 커졌다. 곧, 죽음을 예비하며 하나 둘 정리하던 엘레느가 유일하게 내려놓지 못하고 꼭 붙잡던 것이 로랑과 소민이었다. 이들에게는 자신이 죽어도 이들 마음속에 있으니 괜찮다고 했지만 매일 이들의 얼굴을 볼 때마다는 운명으로부터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에 혼자 있는 집에서 울곤 했다.


 다가올 슬픔을 앞에 두고 소민은 다시 한번 붓을 들었다. 소민은 자신이 보는 것과 기억하는 것을 그려왔지만 이제 새로운 영역인 추상화, 죽음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물로 그래피티라는 추상적인 그림을 조금씩 그려왔다) 자신의 마음이 받아들이고 생각하는 죽음과 기다림 그리고 죽는 이를 옆에서 지켜보는 이에 대해 연구하는 소민은 괴로웠다. 추상적인 것을 시각적으로 그려내는 것은 그녀에게 즐거움이었지만, 죽음이라는 공포심 가득한 것을 그리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다. 죽음에 관해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빛의 자국조차 보이지 않고 어둠과 그 속에서만 살아간다는 두려움과 징그러운 공포감만 커졌다. 그럼에도 소민은 멈추지 않았다. 그림은 소민의 모든 것이고 이별을 대비하며, 슬픔을 달래며 엘레느와 이별을 영원히 기억할 유일한 통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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