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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abica Duck Oct 25. 2021

10월 2주 차

열중하다 : 한 가지 일에 정신을 쏟다.

 긍정적이라면 죽을병이 완치되기도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실제 긍정적인 생각과 웃음이 직접적으로 병을 치료했다면 세상에 암과 같은 병으로 죽는 이의 수도 절대적으로 줄어들겠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며 부수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정도로 봐야 할 것이다.


 겉보기에 엘레느가 이전과 다른 점이 많지 않았다. 몸속은 장이 꼬이고 뒤틀며 기능을 더는 하지 못하고 멈춰버렸을지 모르지만 겉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이제는 빠르게 행동하지 못해 요리를 포함한 집안일은 로랑과 소민의 몫으로 돌아갔고 엘레느는 앉아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시간을 보냈다. 말도 여전히 했지만 예전만큼 많이 못하고 길어질수록 숨을 찼다. 저녁 식사 후에는 여전히 산책을 다녔는데 이제는 소민까지 세 가족이 다 함께 저녁 운동을 했다. 둘이 걷던 때보다 속도가 줄어든 것이 둘에서 셋으로 걷는 인원이 늘어서인지 아니면 전보다 빠르게 걷는 것이 힘든 엘레느의 걸음을 맞춰서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결론적으로는 산책은 더 이상 운동이라 할 만큼 속도가 아니였.


 모두가 똑같이 아팠다. 엘레느의 아픔으로 로랑과 소민은 마음이 아팠다. 그렇지만 모두가 혼자 있을 때만 슬퍼했고 함께 있을 때는 어느 누구도 슬퍼하지 않았다. 소민의 가족은 정말 행복했다. 최소한 행복해 보였다. 행복 그리고 긍정적인 태도 덕분인지 엘레느에게 다가올 곧은 결코 곧이라 부를 만큼 짧지 않았다. 엘레느 스스로는 창 밖의 눈이 녹아 땅 속에 스며들 즈음에는 엘레느 자신도 재가되어 로랑과 소민의 눈물 섞인 축복 속에서 강바닥에 흩뿌려져 자리를 잡을 줄 알았다. 하지만 엘레느는 자신의 눈으로 눈 녹은 자리 새싹이 돋으며 옆 집 담을 너머 도로로 나와 인사를 건네는 개나리를 볼 수 있었다. 살아있는 매일은 덤이며 행운이고 축복이었다. 지금 자신의 한쪽은 끝없이 약해지고 무너지고 있을 줄 모르나 그럼에도 삶은 감사이며, 즐거움이고 행복 그 자체였다.


 소민은 여전히 엘레느에게 붙어있으려 했다. 머리 한 곳에서는 소민에게 죽음을 알려주던 날 엘레느가 벤치에 앉아있던 모습이 계속 떠올라 흥미도 재미도 없는 학교에서 벤치에 앉은 엘레느의 인상을 공책 한 면에 스케치하며 시간을 보냈다. 소피를 비롯한 친구들은 더는 소민과 놀지 않았다. 늘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어떤 말에도 시큰둥했고 방과 후 바로 집으로 가는 소민과 같이 놀 이유가 없었다. 소민의 시야는 좁아져 무엇을 보거나 듣거나 경험할 여유도 생각도 없고 오로지 집에서 살아있는 엘레느를 따라다니며 그 옆에 앉아 시간을 보낼 생각뿐이었다. 엘레느가 아픈 이후로는 로랑도 집에 일찍 왔다. 셋은 돌아가면서 저녁 메뉴를 정하고는 요리를 해 먹었다. 저녁 산책까지 마치고 나면 엘레느는 몸이 더는 버티지 못해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소민과 로랑은 엘레느가 잠이 들고 나면 각자 하루간 쌓은 시간을 되새김질하기도 하며 소일거리를 했다. 특히 소민은 어릴 적부터 몰입을 해왔기에 한 가지 일에 열중하면 남이 개입하기 전까지는 벗어나지 못했다. 언제나 엘레느가 잠들고 난 이후에는 그림을 그렸는데 소민은 시간을 신경 쓰지 않았지만 어린아이의 성장은 몸속에서 뿐 아니라 외부의 역할도 중요했기에 로랑이 언제나 방에 들어와 그림 그리는 소민을 깨우며 캔버스가 아니라 침대에서 잠을 자야 한다고 말해줬다. 그때마다 소민은 하품을 하며 하루간 쌓아온 피로를 한 번에 흡입했고, 그 무거운 피로를 침대에 녹여냈다.


 매일은 비슷하지만 다르다. 그 다름을 느끼면 매일을 새롭게 보낼 수 있지만 느끼지 못한다면 매일을 똑같은 날의 반복으로 받아들일 뿐이다. 그렇지만 매일을 한 가지에 열중하게 되면 매일을 똑같다느니 다르다느니와 같은 논쟁마저 설 자리를 잃는다. 소민에게 매일은 언제나 엘레느와 함께할 수 있는 특별한 하루였고 그 특별함이 반복되면 익숙함에 무뎌지고 늘어질지 모르나 그것마저 소민의 생각거리가 아닐 정도로 소민은 엘레느와의 하루만 신경 쓸 뿐이었다. 어른, 아이 가릴 것 없이 모두가 동일하게 생각해도 소민과 같은 특별한 아이에게는 적용되지 않을 뿐이었다.


 옷이 얇고, 짧아질 때까지 엘레느는 매일같이 눈을 떴다. 무더운 여름이 다가왔고 여름휴가의 시작이었다. 사람 많은 곳은 기가 빨리기에 엘레느는 조용한 곳으로 휴가 가는 것을 좋아했다. 자신의 마지막일지 모르는 휴가를 어디로 가면 좋을지에 대해 토론의 장이 열렸다. 로랑은 파리에 가 지인들을 만나자 인사도 하자고 했다. 소민에게도 오랜만에 고흐의 그림을 또 볼 수 있는 기회라고 설득했다. 소민은 굳이 가지 않아도 된다며 집 밖으로 나가면 위험할지 모른다 했는데 이는 어린아이의 배려심이 담긴 제안이었다. 결정은 엘레느의 몫이었는데 그녀는 어느 쪽도 끌리지 않았기에 고르지 못하고 결정을 미뤘다.

결국 결정은 내려지지 못했다. 결정을 미룬 후 며칠 뒤, 엘레느는 입원했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온 소민이 의자에 힘없이 누워있는 엘레느를 발견하고는 119에 연락해 병원으로 이송했다. 엘레느의 몸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이제는 엘레느를 포함해 로랑도 소민도 이별을 받아들여야 할 때가 되었다. 다만 받아들여야 할 때가 된 것과 받아들이는 것은 별개다. 아직 소민은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아직 그림을 완성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부족함, 미안함, 슬픔, 원치 않으며 인정하기 싫은 그 모든 것은 눈물 안에 담겼고 우는 소리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지나간 시간에 대한 혐오감이 배였다. 그 울음에 담긴 소민의 본질, 사랑을 느낀 엘레느는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며 괜찮다며 토닥였다. 괜찮은 것은 무엇일까. 보이지 않는 것은 모든 게 괜찮았고 보이는 것은 괜찮은 것이 없었다.


 엘레느의 재를 뿌리던 날 로랑도 소민도 울지 않았다. 살아있는 자는 살아야 한다는 이기적인 책임감은 아니었다. 로랑은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이제 자신은 혼자다. 소민은 보호해야 하지 함께 시련을 겪고 견뎌내야 할 이가 아니다. 깊은 절망감에 빠졌다. 힘이 나지 않았다. 울 힘조차 없었다. 세상이 던질 시련을 더는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바람을 타며 강에 흩뿌려지는 재 알갱이 하나하나에는 엘레느의 얼굴이 있었다. 로랑은 엘레느를 기억하고 있었다. 한 줌의 재가 되어 강바닥에 누운 엘레느를 로랑은 기억할 뿐이었다.

소민은 슬펐다. 엘레느가 재가 되어 더는 볼 수도, 들을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것도 그렇지만 엘레느에게 자신의 그림을 보여주지 못해 슬펐다. 그리고 그 슬픔 안에는 힘이 있었다. 자신은 기억해 늘 마음속에 있는 엘레느에게 그림을 보여주겠다는 열정이 있었다.


 엘레느가 없는 집안 풍경은 사뭇 달라졌다. 변화가 생기면 변화에 맞춰 변화하기 마련이지만, 소민의 집은 한동안 그대로였다. 조금  근본적으로는 무력감에 빠져 이제는 희망을 잃고 고아가  로랑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 그랬다. 희망을 잃은 이는 스스로 희망을 찾기 전까지는 누군가 돕지 않으면 벗어나지 못한다. 엘레느가 없는 자리 로랑이 다시 일어나기 위해서는 스스로 희망을 찾는 방법밖에 없었다. 소민은 더더욱 그림에 목을 맸는데 시간 개념 없이 그림을 그렸다. 새벽까지 그림을 그리는가 하면  새도록 그림을 그리는 날도 있었는데 이로 인해 정신이 피폐해지기도 하고 육체적으로도 피곤했다. 그럼에도 소민은 그림 그리고 그림 그리고 그림 그리는 매일을 보냈다. 무언가 열중한다는 것은  마음을 불태우는 일인 만큼 값어치 있고 의미 있으며 가치가 있지만  안에 매몰되어 브레이크를 잡을  모르거나 주위에 도와줄 이가 없다면 이는 결국 스스로를 파멸의 길로 인도할 뿐이다. 물론 어린 소민에게는 어떠한 생각보다는 그림을 그리는  행위만이 살아있게 하며 소민의 흔적을 결과적으로 남겨주기도 했다. 며칠이 지나 로랑이 겨우 정신을 차리면서 스스로와 소민을 챙겼고, 브레이크가 걸렸고, 변화에 맞추어 소민과 로랑도 변화할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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