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해석하다 : 옛것을 새로운 관점에서 다시 해석하다
소민의 상상에서 소민은 프랑스를 떠나 유튜브에서 보던 한국의 거리를 걸었지만 현실에서 소민은 매일같이 등굣길을 걸을 뿐이었다. 익숙하면 가까워진 듯 보여도 마음에서는 멀어지는 경우가 있어 소민은 한국에 가고 싶은 마음은 날이 갈수록 타오르는데 매일을 똑같은 곳을 지나며 견뎌야 했기에, 더불어 그 기다림은 언제까지일지 몰랐기 때문에, 그림을 그리며 흥미롭게 바라보던 풍경은 점점 흥미를 끌지 못했다. 건강에 적당한 자극을 주는 음식이 좋은 것처럼 소민에게는 건조한 삶을 적셔줄 새로운 자극이 필요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소민은 정신적으로 너무 괴로웠다. 자극 없는 삶에서는 엘레느의 유언이 머리 주변을 끝없이 맴돌아 유언과 로랑의 말을 대조하고 자신의 해석과 다른 부분에 열을 받았고, 더불어 어찌할 수 없는 현실에 좌절을 느꼈다. 그 악순환의 굴레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자극을 찾아 나섰다. 새로운 자극을 쉽게 받는 방법 중 하나는 낯선 환경에 가는 것이다. 한국은 아니지만 한국인 것처럼. 평일에는 로랑이 근무하는 날인만큼 디 레지 멤버들과 근교로 버스나 기차를 타고 나갔다. 바다에 가 놀기도 하고 몰래 농장에 들어가 포도나 밀 밭을 지나며 아직 익지 않은 포도를 따거나 한참 자라는 밀을 꺾기도 하고, 옆 도시에서 그래피티를 그리다 도망치기도 했다. 더불어 그들의 활동을 보고 연락하는 사람들에 대한 불안함이나 거부감이 작아져, 그만큼 그들은 스스로 컸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예술인들을 만나기도 했다. 물론 가끔 그들을 위협하는 부랑자도 있었지만 그들은 여럿이니까, 또 함께 뭉쳐있음에서 배짱이자 용기가 생겼기에 위험에도 맞서곤 했다.
로랑은 이런 소민을 이해했다. 현실적으로 현재의 틀에서 벗어날 여력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소민을 다그치지 않았다, 아니 다그치지 못했다. 인간은 이 땅에 살며 먹고, 자고, 움직이지만 사회를 구성하면서 사는 것은 사회에 종속되어 버렸다. 제도권 내에서 아이가 살아가는 것은 안전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한 편으로 사회의 한 조각이 될 수 있도록 모난 부분을 마모시키는 사회화의 과정이기도 하다. 안전을 빌미로 날 때부터 자유는 제한되며 자유의 크기는 작아지지만 인간은 망각과 적응의 동물이기에 자유가 크다고 생각하며 만족하고 사회의 한 부품이 되는 길을 택하게 된다. 사회화나 사회가 옳은지 그른지에 대한 논의는 없다. 역사는 승자의 뜻대로 기록되고 그것이 정의가 되니 말이다. 로랑은 이미 사회에 속한 자면서 그 역할에 큰 불만을 갖고 살지 않았다. 소민은 태어날 때 운 좋게(?) 제도권에서 멀어질 수 있었지만 불행하게(?) 입양을 통해 구원을 받았고 사회화를 거쳐왔다. 하지만 타고난 성향은 로랑-엘레느 부부의 선한 가르침에 가려져 있었을 뿐, 반항적이고 거칠었다. 그리고 아직 한참 자라고 있었으며 사회가 만들어놓은 현실에 미숙했기에 자신의 뜻과 다른 현실이 답답하기만 했다.
소민은 로랑에게 주말에 놀러 가자고 했고 로랑은 소민의 마음을 짐작했기 때문에 외곽으로 놀러 다니기 시작했다. 만약 한국에 아는 지인이 있었다면 소민을 한국에 맡기는 타개책도 생각했겠지만 소민이 태어난 나라라는 것이 아는 전부였기 때문에 한국에 가는 것은 미뤄둘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차를 타고 안 가본 도시를 가보는가 하면, 기차를 타고 파리나 바르셀로나 같은 대도시도 다녀오며 새로운 자극을 주려고 노력했다. 새로운 도시에 가면 소민은 그림을 그렸고 로랑은 책을 읽었다. 식사를 하며 로랑은 자신의 어릴 적 이야기를 소민은 주중에 겪은 이야기를 나눴다.
여전히 엘레느의 이야기에 대한 해석의 차이는 있었다. 다만 소민이 디 레지 멤버들과 함께 여러 위기를 넘기면서 세상이 언제나 환하게 웃으며 맞이해주지는 않음을 느꼈다. 완전히 동의는 하지 못해도 로랑이 소민을 위해 혼자서는 한국을 보내지 못한다는 말은 이해할 수 있게 됐다. 그렇게 소민은 한국에 대한 마음을 다른 자극을 통해 달래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계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