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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나 작가 Feb 12. 2024

설 명절, 시아버지와의 대화

마음 따뜻해진 시간


"책 나오면 내게 한 권 다오."

"아버님! 책 나오면 사주셔야 해요. 사주셔야죠."

옆에서 듣던 시댁 식구들도 며느리 책을 사줘야지, 뭘 달라고 하냐고 한 마디씩 했다. 

이에 얼른 아버님이 말씀하셨다.

"그럼 내가 사줘야지. 예전에 내가 아는 사람도 시집을 냈는데 내가 여러 권 사줬더니 베스트셀러가 됐어."

이 말을 듣고 시누이가 말했다.

"아버지! 시집이 잘 팔려서 베스트셀러가 된 거야. 아니면 아버지가 사줘서 베스트셀러가 된 거야?"

굳이 꼬집었다. 부녀의 케미로 한바탕 웃었다.


며느리가 쓴 책이 나온다고 하니 기분이 좋으셨나 보다. 아버님의 말수가 많아지셨다.

아버님도 글 잘 쓰신다. 남편과 나는 주례 없는 결혼식을 했지만, 아버님이 길게 글을 써서 낭독해 주기도 했다. 당시 하객으로 왔던 사람들이 내게 시아버지 글 잘 쓰신다는 말 많이 했었다.


"내가 학교 다닐 때 선생님께 편지 쓰는 숙제가 있었거든. 선생님이 한 사람씩 편지를 다 읽어줬는데, 갑자기 내 이름을 부르는 거야. 그러더니 내 편지가 가장 좋았다고 말씀하시더라고."

슬프거나 감동적인 얘기는 아니었다. 그런데 말씀하시는 아버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목소리 떨림도 없고 그냥 편한 모습이어서 옆에 있는 누구도 몰랐다. 정면으로 마주 앉은 나만 보았다.

옛 추억 속 선생님과 친구들이 떠올랐던 것이었을까?


시아버님은 말기암 환자이다.

남편과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암 판정을 받았다.

아버님은 몸이 안 좋은 걸 예상했지만 결혼식 때문에 미루었다고 했다. 협심증 때문에 수술받았다가, 암 말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판정받을 때 길어야 5년 수명을 예상하고 있었다. 이미 8년째 아버님은 건강하게 살아계신다.


"내가 암 판정받고 얼마 안돼서 친구랑 전체 다섯 명이서 철학관에 갔었거든. 거기서 내가 제일 오래 살 거라고 하는 거야. 그래서 내가 뭐라고 했지. 나는 말기암 환자라고. 무슨 소리하는 거냐고.

그랬더니 철학관에서, 자기 눈엔 그렇게 보인다고 관상이 제일 좋다고 그러더라고. 

그 이후에 같이 갔던 친구가 먼저 세상을 떠나기도 했어."


내가 보기에도 아버님 얼굴이 밝고 훤하다. 설 명절에 가족이 모두 모여서 그런지 얼굴에 행복이 가득해 보였다. 그 철학관에서 한 얘기가 꼭 맞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래오래 살아 계시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님은 직업 군인이었다. 부대를 지휘하고 통솔하는 직급까지 맡았었다.

"나는 뭔가 고민이 생기면, 하루 종일 생각하거든. 이걸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하고. 그러다 보면 해결책이 떠올라. 근데 사람들은 그 원리를 모르더라고.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해냐고 신기해하는 거야."

부대에서 군인들이 아무리 밥을 먹어도 늘 배가 고프다는 얘기를 했다고 했다. 그런데 막상 배식하고 밥은 남았다. 이걸 어떻게 해결하나, 한참을 고민하다가 밥을 자율 배식으로 바꿨다고 했다. 그전에는 자율 배식이라는 시스템 자체가 없었다. 획기적인 방법이었을 테다. 양이 적은 사람은 적게 가져가고, 많은 사람은 많이 가져가서 먹으면 되니, 밥을 남길일도 없고 결과는 성공적이었다고 했다.


"또 한 번은, 조리담당 군인들은 삼시세끼 만들려면 힘든데, 다른 병사들이 보기에는 노는 것 같아서 자꾸 시비가 붙는 거야. 그래서 내가 또 한참을 고민하다가, 구멍만 하던 배식구를 넓혀서 개방형으로 바꿔버렸어. 그럼 안에서 열심히 고생하고 일하는 걸 다 보게 되잖아. 그때부터 문제는 다 해결된 거지.

이게 소문이 나가지고 전국적으로 다 바뀌어버렸어."

아버님 말씀 들으면서 대단하다 싶었다. 지금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 당시에는 발상의 전환이었을 것이다.

몰입하고 고민해서 신세계를 만들어 낸 아버님이었다.


최근 유튜브를 보면 성공하는 방법으로 계속 생각하고 몰입하라는 내용이 나온다. 아버님이 하신 것과 다를 게 없다. 성공인자 갖추신 분이 바로 옆에 계셨다. 꼭 유명한 사람에게만 배우는 건 아니다. 가족도, 부모도 평범한 지인들도 이미 삶의 성장하는 방법을 알고 실천하고 있을 수 있다. 그걸 눈치채지 못했을 뿐. 


설 명절, 아버님의 귀중한 경험 들으면서 배우기도 하고 오래 대화할 수 있어서 좋았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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