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체 간의 공존
삼 년 전 친한 친구가 여름방학을 맞아 한 달간 밴쿠버로 골프여행을 온다고 했다. 나는 그 친구가 머무는 동안 한 번만이라도 함께 라운딩을 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남편에게 골프를 배우기 시작했다.
내게 운동이란 아침저녁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출퇴근하는 것이 전부이고 나는 맨손 체조도 귀찮아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골프채를 휘두르려니 온몸이 안 아픈 곳이 없었다. 운전과 골프는 남편에게 배우지 말라고 했던가? 무슨 운동이든 잘하는 남편이 운동 신경이 무딘 나를 어찌 이해한단 말인가. 이렇게 하면 저렇게 해라 저렇게 하면 이렇게 해라. 도대체 뭐가 뭔지... 말귀를 못 알아듣네 어쩌네. 연습을 안 하네 마네. 집중을 안 하고 건성이네. '휴우...' 내 태어나 그런 소리들을 듣고도 그만 두지않은 것은 순전히 '우정' 을 위한 내 인내였음을 언젠가 그 친구에게 알리리라.
남편에게서 배우는 골프는 솔직히 재미없었다. 다른 코치에게서 배우려면 시간도 더 들고 돈도 들고. 골프를 나름 잘 친다는 남편이 내가 남에게 배우는 꼴을 볼리도 없고. 골프에 대한 정보는 차고 넘치는데 차라리 혼자 독학으로 배우는 게 더 낫겠다 싶기도 하고. 폼이 이상하면 어떠리 공만 맞으면 되지 이런저런 생각들이 빼곡했다. 배울수록 더 하고 싶은 욕심이 들어야 하는데 남편의 짜증 섞인 말투에 이걸 왜 배운다고 했나 후회를 했다. 좀 재미있게 동기부여를 만들어 가면서 하면 좋을 텐데 무슨 운동선수 대회 준비시키듯 동작을 할 때마다 한 마디씩 설명을 덧붙이고 한 동작이 잘못되면 어쩌고저쩌고...
레슬링, 럭비, 펜싱, 태권도, 주짓수 등 다양한 운동을 해오고 있는 딸아이가 내게 골프를 잘 배우고 있냐고 물었다. 내가 LPGA (여자 프로골프) 나가려고 골프를 배우는 것도 아니고 단지 민폐를 끼치지 않을 정도만 치고 싶은데 아빠가 나를 운동선수시킬 작정인가 보다고 불평했다. 딸아이는 그 특유의 호탕한 웃음으로 이렇게 말했다 "모든 유명한 운동 코치들은 다 엄하다"라고. 그리고 "민폐를 끼치지 않는 정도라는 것이 열심히 노력해야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니 아빠가 엄마를 제대로 가르치고 훈련시키는 것"이라고 했다. '나 원 참... 그 아버지에 그 딸이라더니... '
그러나 딸아이의 말을 듣고 나서 생각해보니 남편이 나를 보면 짜증이 날만도 했다. 골프를 남편이 가르쳐 주겠다고 한 것도 아니고 내가 필요해서 배우겠다고 시작했는데 연습하자고 사정하는 쪽은 항상 남편이었다. 저녁을 먹고 뒷마당에 나가서 치핑(Chipping) 연습을 하자고 하면 나는 마지못해 나가고 삼십 분도 채 안되어 화장실 가야 한다며 들어오거나 전화를 받아야 한다고 들어오기가 일쑤였다. 그러니 골프가 어느 세월에 늘겠는가.
그렇게 서너 달이 흐르고 드디어 친구가 밴쿠버에 도착했다. 남에게 민폐가 되는 것을 아주 싫어하는 남편은 내 골프 실력이 아직 한참 멀었기 때문에 자기도 동행해서 나를 리드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친구와 나는 남편의 감시 없이 우리끼리의 명랑 골프를 즐기기로 했다. 예약을 다 마치고 남편에게 운전을 부탁하자 남편은 상상 이상으로 화를 내고 내게 일정을 취소하라고 했다. 친구랑 즐겁게 치고 오라 할 줄 알았는데 반대로 내가 자신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둥, 겸손을 모른다는 둥, 골프장에서 룰도 제대로 안 지키고 엉망으로 치면 남들에게 얼마나 피해를 주는 줄 아느냐 모르느냐 등등. 그날 밤 나는 지난 서너 달간 골프를 배우며 참고 참아왔던 울화가 드디어 폭발했다. 취소는 무쉰!
아침이 되니 간밤에 반대하던 그 아저씨는 어디로 사라지고 남편은 '그래 조심해서 잘 치고 오라’고 했다. 그리고 골프장에서 다치는 사람도 많으니 다치지 않도록 조심하고 또 내가 남을 다치게 하지 않도록 주의 또 주의하라고 못이 박히도록 반복했다. 골프장에 도착하여 필요한 것을 내려주고 떠나는 남편은 나를 뒤돌아 보고 또 보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조심해서 치고 오라는 당부를 했다. 나는 남편의 차가 떠나자 그제야 만발의 미소를 머금고 친구를 만나러 갔다.
남편 없이 친구와 치는 골프는 말 그래도 명랑 골프였다. 폼이 좀 망가지면 어떠리. 실수를 해도 누가 혼내지 않고 좋은 경치 보면서 이런저런 재미난 이야기를 나누고 어쩌다 한 번 샷이 맞으면 '나이스 샷!' 하면서 서로 응원해주고 즐거움 자체였다. 친구는 내가 워낙 운동 신경도 둔하고 이제 배우기 시작했으니 공이 뜨기나 하려나 했는데 자세부터 깜짝 놀랐다고 역시 선생님을 잘 만나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시작한 골프를 지금은 즐기고 있다. 남편과 딸은 내가 그때 잠시 하고 그만둘 줄 알았다고 한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연습을 따로 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의 연습부족에 대한 남편의 불만도 여전하다. 몸이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아서 지금도 골프 치면 아픈 곳이 많다. 그러나 날씨가 좋고 시간이 나면 골프장을 찾는다. 내가 지금도 골프를 치는 것은 골프 자체를 즐겨서라기 보다 골프장에서 누리는 아름다운 자연과의 데이트 때문이다라고 해야 맞을 것 같다.
나는 검은새(Blackbird)를 싫어했다. 쓰레기통을 뒤져서 동네를 온통 어질러 놓고 깍깍 내는 소리가 내겐 우악스럽게 들렸다. 심지어는 먹을 것을 찾느라 골프백 지퍼를 부리로 쪼아서 고장내기도 하는 겁없는 도둑놈. 떼 지어 다니는 검은새들을 볼 때마다 그저 괘씸한 생각만 들었다. 그런데 골프장에서 자연의 조화로움과 공생을 목격한 이후 나는 더 이상 검은새를 더 미워하지 않게 되었다.
골프장은 작은 동물의 왕국이다. 그곳은 대체로 평화롭지만 때로는 그곳에서 벌어지는 생존경쟁이 TV 속 동물의 왕국과 다를 바 없다.
내가 자주 다니는 골프장은 두 개 코스가 있는데 한쪽 코스에는 유독 거위들이 많다. 오후가 되면 평화로운 거위들의 세계에 배가 고픈 코요테 한 놈이 나타난다. 이때 검은새들은 코요테를 따라다니며 깍깍거린다. 거위들에게 코요테가 왔으니 피하라는 신호를 주는 것이다. 거위들 주변으로 코요테가 아주 가까이 접근하면 검은새 여러 마리들이 한꺼번에 크고 다급한 소리를 낸다. 그러면 거위들이 우르르 연못으로 들어가거나 하늘로 날아간다. 잡아먹지 않으면 잡아먹히는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약자끼리 돕는 모습을 보게 된다.
봄에 태어난 새끼 거위는 참 귀엽다. 새끼 거위들이 풀을 뜯어먹는 동안 어미 거위들은 주변을 지키고 사람들이 가까이 가면 '쉬이..' 하면서 위협적인 소리를 낸다. 한 두어 달이 지나면 그 새끼들이 많이 자란다. 일일이 어떤 거위가 어떤 거위인지는 모르더라도 골프를 치러 갈 때마다 새끼 거위들이 그새 얼마나 자랐나 어림짐작해볼 수 있다. 그곳에는 두루미도 있다. 두루미는 물고기를 잡으려고 한참 동안 미동도 하지 않는다. 그러다 큰 물고기를 잡으면 부리로 물고 흔들어 찍어 먹는다. 여름이면 흑곰도 나타난다. 골프장 주변에는 블루베리 밭이 많은데 곰이 블루베리를 따 먹으러 골프장을 가로질러가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모든 생명이 서로 돕고 사는 자연의 생태계 앞에서 나는 겸손해진다. 자연이 변화하는 순간들을 지켜보면서 땅에 있는 모든 생명이 사람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아름다운 푸르름과 경이로운 생명의 잉태 그리고 그 생명들 간의 공존에 넋을 잃고 만다. 나는 아름다운 자연을 담기 위해 부지런히 핸드폰을 찾는다. 뒤쳐지는 나를 보고 남편은 골프장에 골프 치러 왔나 사진을 찍으러 왔나라며 재촉한다.
초보자가 우리 앞에서 골프를 치면 늦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공이 잘 안 맞았다고 매 홀 몇 번이나 반복해서 치고 공 찾으러 가서 한참 후에야 나타나고 이런 것들이 반복되면 뒷사람들은 줄줄이 지연된다. 그럴 때 나는 혼잣말을 내뱉는다. “아고 민폐구먼. 눈치껏 쭉쭉 나가줘야지." 그럴 때 남편은 나를 보고 한 마디 던진다, "많이 컷네 조선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