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 공동체
많은 이민자들이 캐나다로 이민을 와 한 곳에 정착하게 되면 먹고 사느라 또는 다른 여러 가지 이유들로 드넓은 캐나다를 많이 경험해보지 못하기 십상이다. 나 또한 기회가 되면 한국을 한 번이라도 더 방문하는 일에 열을 올렸지 정작 내가 살고 있는 넓은 캐나다를 경험하는 일에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았었다. 그러다가 두 아이들이 캐나다 군 장교가 되고 근무지가 바뀔 때마다 아이들을 방문하게 되면서 뒤늦게 캐나다의 여러 곳을 경험하게 되었다. 캐나다의 특색과 내가 여행했던 곳들에 대한 기억들을 천천히 브런치에 올려 보려고 한다.
오늘은 캐나다의 이중언어 정책과 다문화 정책에 대해 정리해보고자 한다.
캐나다는 러시아 다음으로 세계 두 번째로 (9,984,670 평방 킬로미터로 우리나라의 한 100배 정도) 큰 면적을 가지고 있고 10개의 주(Provinces)와 3개의 준주(Territories)로 구성되어 있다. 주와 준주 사이에는 헌법상의 구분이 있다. 주는 주정부 자체적으로 헌법상의 권한을 행사하는 반면, 세 개의 준주 (Northwest Territories, Nunanvut, and Yukon 아래 지도에서 보이는 맨 위쪽/북쪽)는 캐나다 의회의 권한 하에 위임된 권한을 행사한다. 그래서 준주는 주정부가 아니라 연방정부가 권한을 행사한다. 이곳은 날씨도 많이 춥고 인구 수도 많지 않다. 2016년 캐나다 인구조사에 따르면 캐나다 전역에 있는 한인의 숫자는 총 16만 명 정도 되는데 온타리오(Ontario) 주에 6만 명 정도 그리고 비씨(British Columbia) 주에 5만 명 정도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이곳에서 지도를 가져옴 (https://www.123rf.com/photo_57132488_canada-map-with-provinces-all-territories-are-selectable-vector-illustrtation.html)
캐나다라는 나라는 영국 의회가 1867년 영국 북미 법(British North American Act)을 통과시키면서 캐나다의 자치령(Dominion of Canada)이 공식적으로 탄생되었다. 원래 캐나다의 공식 국가 이름은 Dominon of Canada이었지만 Dominion이라는 단어는 1960년에 초부터 거의 사용되지 않다가 1982년부터 매년 7월 1일은 Dominion Day가 아닌 공식적으로 캐나다 데이(Canada Day)로 변경되었다.
캐나다라는 이름은 1534년-1763년 사이 퀘벡(Quebec 위의 지도 오른쪽 분홍색 주)이 처음으로 캐나다라고 불렸다. 원래 퀘벡은 뉴 프랑스/누벨 프랑스(현재의 퀘벡주와 온타리오주)의 영토로 프랑스가 점령하고 있었으나 1756-1763년 까지 있었던 7년 전쟁 후 파리조약으로 1763년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때부터 캐나다에서는 영국계가 정치와 경제적 우위를 차지했다. 반대로 퀘벡의 프랑스계는 소외되고 멸시를 받아왔다. 퀘벡의 프랑스계는 당시 사회 경제적, 언어와 문화적 열등 상황에 대한 불만이 컸으며 이것은 퀘벡 분리주의 싹을 키워갔다.
이때 자유당 정권의 수장이던 피에르 트뤼도 총리(Pierre Elliott Trudeau 현 캐나다의 총리 쥐스탱 트뤼도의 아버지)는 퀘벡의 이러한 분리주의/독립운동 움직임을 연방 분열의 위기로 심각하게 받아들여 1969년 영어 불어 공용 이중언어정책을 선언했다. 이중언어정책이 프랑스계를 대등한 파트너로 인정하고 다문화주의의 토대를 형성하기 위한 것임은 분명하지만 퀘벡이 가지고 있는 지리적인 위치의 중요성 (대서양과 노바스코샤 주와의 연계성 등)을 고려한 정책이었을 것이다. 캐나다는 1971년에는 다문화주의를 선언, 1982년에는 인권과 자유 헌장, 1988년에는 다문화주의 법 제정과 같은 정치 제도를 만들어서 다문화주의를 공식적인 국가 정책으로 삼아왔다.
이러한 노력 등에도 퀘벡의 독립 열기가 꺼지지 않자 퀘벡 주민을 대상으로 하는 퀘벡 독립 여부에 대한 투표가 두 번에 걸쳐 실시되었다. 1980년에 이루어진 투표 결과는 연방 탈퇴 반대가 59.56%, 연방 탈퇴 찬성이 40.44%였다. 그리고 1995년에 이루어진 투표에서는 연방 탈퇴 반대가 50.58%, 연방 탈퇴 찬성이 49.42로의 근소한 차이로 무산되었다. 최근의 설문조사 등에서는 연방 탈퇴 반대 의견(특히 젊은 층)이 더 많아지고 있다.
지리적으로도 중요한 퀘벡은 전 세계 메이플 시럽의 약 73%를 생산한다. 메이플 시럽은 와플이나 팬케이크에 발라먹는 꿀같이 생긴 시럽인데 단풍나무 수액을 추출해서 만든다. 그런데 올해는 메이플 시럽 수액 흐름에 맞는 날씨가 받쳐주질 못해서 생산이 많이 감소했다고 한다. 며칠 전 캐나다 뉴스에 따르면 퀘벡주의 메이플 시럽 생산을 관장하는 조직 QMSP(Quebec Maple Syrup Producers)가 전략 비축지에서 일반 시장으로 약 2,270만 킬로그램의 메이플 시럽을 출시한다고 한다. (죄송 잠시 옆길로 새었음 ㅎ. 퀘벡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나의 퀘벡 여행기에서 올리겠음.)
캐나다에서는 이중언어 정책에 따른 다양한 이중언어 교육도 활발하다. 일반적으로 1960년대까지는 이중언어 교육에 대해 부정적으로 여겨졌으나 그 이후 많은 연구에서 이중 언어 사용이 긍정적이고 유리하다는 결과가 지배적이다. 학업성과면에서도 앞서고 심리적인 요인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가 많다. 사회적인 관점에서도 이중언어 및 다국어 능력은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캐나다 토론토대학에 있는 유명한 언어 교육학자 짐 커민스(Jim Cummins)는 다양한 사회에서 '언어적 자원'을 강조했다. 세계화 속에서 언어는 일종의 '경제적 자원'이다. 사회언어학에서는 이중언어 사용을 '추가적(additive)' 이중 언어와 '뺄셈(substractive)' 이중언어 두 가지를 구분했다. 추가적 이중언어란 모국어를 잘하면서도 제2의 언어도 유창한 것을 말하며 뺄셈 이중언어란 한 가지 언어가 지배적이면 다른 언어는 약해지는 것을 말한다. 아이들의 긍정적 교육과 인지력은 추가적 이중언어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다시 말하자면 두 가지 언어를 다 잘하면 아이들의 학업 성취나 인지적인 발달에도 도움이 된다고 볼 수 있다.
2016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캐나다에서는 약 140개의 소수민족 언어가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캐나다 공용어인 영어나 불어가 아닌 제3의 언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인구가 크게 늘어 다문화주의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캐나다의 다문화 정책은 주류문화로의 흡수나 동화가 아닌 각자의 고유한 문화를 잃지 않고 지켜가며 서로 조화를 이뤄 균형을 이루는 모자이크(Mosaic)를 강조한다. 그러나 이민자들이 성공적으로 정착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문화적 유산(Heritage)을 지켜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자신들의 모국어나 문화만을 고집해서는 안 될 것이다. 타민족의 문화도 존중해주고 공용어도 증진시켜서 지역 공동체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면 좋겠다. 한인 커뮤니티 내에서 우리끼리만의 좁은 의미의 공동체를 넘어서서 여러 다양한 민족들과 활발히 교류하며 공동체의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물론 말로는 쉽지만 행동으로 옮기려면 많은 노력과 실천이 수반되어야 한다.
지금은 한국의 높아진 국제적, 경제적, 문화적 위상과 한국과 캐나다와의 우호적 관계 때문에 캐나다에서 한국인 이민자로 사는 것은 30-40년 전에 이민 온 앞선 세대에 비하면 훨씬 좋아졌다고 할 수 있다. 30-40년 전에는 한국 사람들을 보고 "너네 나라 중국으로 가 Go back to your country, China"라는 말을 들어야 했던 이민자들도 많았다 (물론 지금이라고 이런 인종차별적 행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차별을 당하고 싶지 않으면 우리끼리 뭉치고 우리 안에 머물지 말고 다문화의 공동체가 더욱 발전할 수 있도록 함께 더불어 살아야 한다. 타민족 사람들을 보고 무조건 "재는, 재네, 재들..."이라며 남을 비하하는 말투와 태도를 가진 한인들이 참 많다. 이런 말투부터 바꿨으면 좋겠다.
많은 한인들은 주류사회로의 진출과 영향력을 한인 정치인이 몇 명 배출되었는가 하는 것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정치인들이 세상을 바꾸어 가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한인 3세대 4세대로 가는 우리 이민 역사가 정치인에 대한 집착을 넘어섰으면 좋겠다. 어느 한 분야가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 젊고 유능한 한인 2세 3세들이 진출하여 다른 인종들과 어울려 살아가며 공동체에 기여하는 것이 한인 이민 사회를 더욱 건강하고 단단하게 만들어 가는 것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