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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선아 SSunalife Jan 10. 2022

거짓말과 침묵의 무게

선의의 거짓말이라도 거짓말은 거짓말이에요.

딸아이는 여름 캠프 참석으로 몇 주간 집을 비우고 여름학기 오전 수업받으러 간 아들은 이미 올 시간이 지났는데 아직 집에 도착하지 않은 한가한 여름 오후였다. 그 전 주에는 아들이 뜻하지 않게 불량배들에게 핸드폰을 빼앗겨서 여러 가지로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다행히 경찰 조사도 진행 중이고 우리는 적지 않은 가격이지만 아들에게 새로운 핸드폰을 사주는 것으로 아들을 위로했다. 오랜만에 찾아온 나른한 오후에 아들 오기 전에 잠깐 눈 좀 붙이려고 소파에 벌러덩 눕자마자 따르릉 전화가 왔다.


헬로우!


수화기 너머에서 XX 부모랑 통화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내가 XX 엄마다라고 하자 우리 집 아래 마트에 지금 내 아들이 있단다. 와서 아들을 데려가라 했다. 나는 무슨 일이냐고 했더니 물건을 훔치려다(shoplifting) 들켰단다.


우리 집에서 그 마트까지는 걸어서 5-10분 밖에 걸리지 않는다. 마트를 가는 내내 가슴이 벌렁거렸다. 남의 집 엄마들이 비슷한 일을 당해서 나에게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 하면 그럴싸한 조언을 해준 적들은 있었으나 내가 이런 일을 마주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더군다나 우리 집은 남편이 아이들에게 아주 엄하기 때문에 나는 이 일을 남편이 알게 될까 봐 그 걱정이 먼저 앞섰다.  




마트에 도착했더니 얼굴이 익숙한 경비원 아저씨가 문 앞에 서있고 그 옆에 아들이 있었다. 내가 도착하자 경비원 아저씨는 웃으며 내게 일부로 오게 해서 미안하다고 먼저 인사를 했다. 우리 식구들은 그 마트를 자주 다녔기 때문에 그 경비원 아저씨와도 평소에 서로 인사를 나누는 사이였다. 경비원 아저씨는 아들이 주머니에 넣었다는 얼룩을 지우는 작은 클린펜 (6불 정도니 한국 돈으로 한 5-6000원 정도)을 내게 보여주었다. 그리고는 아들 어깨를 토닥거리며 다시는 이런 일이 없기를 바란다고 했고 아들은 "오케이"라고 짧게 대답했다. 나는 경비원 아저씨께 불편함을 끼쳐 미안하다는 말과 눈인사를 하며 헤어졌다. 잠시였을 그 순간이 참 길게 느껴졌다.


아들과 나 사이에 짧은 침묵이 흘렀다. 나는 점심을 먹고 들어가자고 하고 우리는 옆에 있는 햄버거 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아들이 음식을 먹는 동안 생각했다. 무슨 말을 어떻게 시작해야 하나 하고. 나는 아들이 햄버거를 다 먹을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내가 고등학교 때이다. 그때 음악 선생님은 잘 알려진 클래식 음악들을 모아서 카세트 테이프에 녹음을 한 뒤 우리가 자주 듣도록 했다. 그리고 수록된 그 곡들 중에서 중간고사 문제를 출제하신다고 하셨다. 음악 선생님이 주신 클래식 음악들이 실린 그 테이프를 광화문 음악사에서 반 전체 학생 수만큼 복사를 했다 (그때는 음악 저작권 등이 체계화되어있지 않을 때였다). 처음 그 카세트 테이프 복사를 맡길 때의 가격은 이천오백 원이었던 같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에게서 이천오백 원을 받아놨다. 그러나 우리 반만 복사를 한 것이 아니라 더 많은 반들이 카세트 복사를 맡기게 되자 양심적인 음악사 아저씨는 가격을 이천 원으로 낮춰주셨다.


나는 어머니께 이미 이천오백 원을 받았는데 남은 오백 원을 어떻게 하나 하고 고민하였다. 그러나 그 고민은 오래가지 못했다. 나는 친구들과 분식점에서 평소 먹던 라면이 아닌 더 비싼 냉면을 시켰고 튀김도 시켜서 친구들과 나눠먹으며 가지고 있던 용돈과 함께 그 오백 원을 다 써버렸다. '처음부터 어머니께 거짓말을 할 계획이 아니었으니 괜찮을 거야'라는 생각과 '그래도 어머니께 허락을 받은 후에 썼어야' 했는데 하는 후회 사이에서 고민이 되었다. 그러나 오백 원은 이미 없어졌고 돈을 이미 다 쓴 후에 어머니께 말씀드리면 어머니를 더 화나게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어머니가 차라리 모르시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고 더 이상 이 일을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집에서 시험을 대비해서 그 클래식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하루는 어머니 옆에서 음악을 듣고 있었다. 어머니께서는 지금 듣는 음악은 작곡가가 누구냐 그리고 곡 제목은 뭐냐라고 물어봐 주셨다. 그러다 내가 못 맞추면 어머니께서 카세트 테이프에 적힌 목차를 보고 읽어주시며 왜 이리 이름들이 다 어렵냐라고 하셨다. 그러고는 이렇게 공부를 하는 세상이 참 신기하다고 하시며 카세트 테이프를 유심히 보셨다. 그러시다 갑자기,


어 이거 이천오백 원이라더니 이천 원이었냐?


나는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아니 어머니께서 어떻게 아셨지?'


어... 그게 엄마...


아주 짧은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어머니는 내게 더 캐묻지 않으셨다. 그리고 "열심히 해라"라고 하시고 나가셨다. 어머니가 나가신 후 카세트 테이프를 보니 카세트 테이프 뒷면에 아주 작게 2000원이라는 표시가 있었다. 카세트 테이프를 여러 번 열었다 닫았다 했는데 '나는 왜 그걸 여태 못 봤을까?!' '돈을 다 썼다 해도 나중에라도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내 얼굴은 이미 홍당무가 되어 있었고 혼자 있는 그 방에서 나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어머니께서는 그날 이후로도 단 한 번도 그 카세트 테이프 가격에 대한 얘기를 내게 하시지 않으셨다.


나는 그날 내게 더 캐묻지도 않으시고 또 엄마를 속였다고 혼내시지도 않은 어머니를 통해서 입 밖으로 나온 말보다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말이 더 무서울 때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침묵이 화를 내는 것보다 더 무겁고 무섭다는 것을 경험한 것이다. 난 그날 이후로 내 어머니 생전에 단 한 번도 어머니께 크던 작던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모르겠다 작은 선의의 거짓말을 했을지도 그러나 크게 기억나는 일은 없는 것 같다). 아니 안 하려고 노력을 했다. 왜냐하면 내가 어머니에게 거짓말을 해도 어머니는 이미 다 알고 계실 거라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햄버거를 다 먹고 음료수를 마시고 있는 아들은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말문을 터주길 기다리듯. 나는 고등학교 때 카세트 테이프에 대한 나의 이야기를 천천히 시작했다. 처음에 의도하지는 않았으나 결국 때를 놓치고 거짓말을 하게 된 꼴이 되었던 내 기억을 아들과 같이 나누었다. 그리고 아들에게 많은 것을 묻고 싶었으나 꾹 참았다. 단지 하나 알고 싶었다.


이번 일이 처음이니?



라고 아들은 짧게 답했다. 나도 모르게 안도의 숨소리가 두 입술 사이로 삐져나왔다.


왜 그랬어? 엄마가 제때 빨래를 안 해줬니?


화(anger)가 나서요...


아들의 화(anger)라는 단어가 내 귀에서 맴돌았다. 나는 아들의 어깨를 두어 번 쓰다듬었다.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서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우리는 그 가게를 나섰다. 나는 아들에게 다시는 오늘 일을 서로 얘기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아들도 다시는 엄마가 이런 일을 접하게 되는 상황을 만들지 않기로 약속을 했다. 그리고 화풀이를 이런 식으로 하면 안 된다고도 일러주었다.  




우리 동네는 꽤나 안전한 곳이었다. 그래서 치안이니 하는 그런 것에 대해서 크게 걱정하지 않고 살았다. 아들의 화는 일주일 전에 생겼다. 일주일 전쯤 아들이 초저녁에 맥도널드 감자튀김이 먹고 싶다고 걸어서 한 10분 거리에 있는 맥도널드를 간다고 나갔다. 그런데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집으로 왔다. 집에 도착한 아들은 눈물이 그렁그렁 해서 돌아왔다.


엄마, 새로 산 핸드폰을 빼앗겼어요.


누구한테?

맥도널드 들어서는 골목길에서 두 명이 칼을 들고 핸드폰을 내놓으라고 했다고 전하는 아들 얼굴이 붉어졌다 푸른색이 되었다 이내 걷잡을 수 없이 슬퍼 보였다. 그래서 아들은 그 자리에서 핸드폰을 주고 맥도널드로 들어가서 경찰에 신고를 하고 왔다고 했다.


우리 집은 아이들에게 핸드폰을 중학교 가서야 사주었다. 그것도 처음에는 남들이 쓰는 것보다도 기능이 떨어진 오래된 사양으로 해주었다. 남편은 아이들이 좋은 핸드폰을 써봐야 게임만 많이 하고 눈만 나빠진다고 일단 아이들이 2년 동안 핸드폰을 모범적으로 쓰는 법을 익혀야 한다고 했다. 그래도 아주 없는 것보다는 나으니 그거라도 어딘가. 2년 간 아빠 눈 밖에 안 나고 그 구닥다리 핸드폰을 썼던 아들은 드디어 아들이 원하던 사양으로 새 핸드폰이 생기자 얼마나 좋은지 내게 모든 기능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통화 한 번 하고 나면 윗 셔츠를 쭉 올려서 호호 입김을 불어 전화기 표면을 닦곤 했다. 그렇게 신줏단지인 핸드폰을 얻은 지 딱 일주일 만에 그 불량배들에게 빼앗기게 된 것이다.


아들의 눈빛은 공허했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꼼짝없이 아무 말도 못 하고 소중한 것을 허무하게 빼앗겼던 자신에게 화가 났던지 몇 번이고 큰 한숨을 내뱉곤 했다. 남편과 나는 똑같은 기종과 사양으로 다시 사주며 괜찮다고 했지만 아들은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큰 위안을 받지 못했나 보다.  




'핸드폰을 빼앗기고 나서 누군가에게 화를 풀고 싶었던 것일까? 세상 사람들이 착하게 살지 않으니 본인도 남에게 피해를 입히고 싶었나?'


경찰 수사가 이루어지고 핸드폰을 빼앗았던 그 불량배들은 그 부근에서 5건이 넘는 나쁜 짓을 하였다는 보고를 접하게 되었다. 알고 보니 그 불량배들은 마약밀매와도 관계가 있었다는데 혹시라도 내 아들이 핸드폰을 안 주려고 저항이라도 했더라면 어땠을까 아찔하기만 했다. 어쨌든 아들은 본인 말고도 그런 피해를 본 사람들이 더 있고 경찰이 그 두 명의 신병을 확보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조금 더 안정되어 갔다.




의사결정을 해야 할 일이 있을 때 나는 남편이 불필요하게 염려하지 않게 하려는 선의의 의도로 "아빠한테는 그냥 말하지 말자"라고 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내 아들은 말한다. "엄마, 아빠가 걱정할 것 같으면 처음부터 하지 마세요. 아니면 아빠가 걱정하더라도 미리 말씀드리고 허락을 구하세요"라고. 그리고 말한다. '선의의 거짓(white lie)도 거짓'이라고. '그래 아들 네 말이 맞다!'


내가 나의 어머니의 침묵에서 부끄러움을 느꼈듯 내 아들도 그때 본인의 행동에 대해 부끄러움이 컷던 것일까? 아이들은 혼내고 야단을 쳐야만 본인의 행동을 부끄러워하는 것이 아니다. 부모가 공감해주고 이해해줄 때 솔직해질 수 있으며 교훈을 심어주려는 많은 언어보다 절제된 표현이 마음을 더 크게 움직이는 것 같다. 어쨌든 그 일 이후로 아들이 되려 엄마인 내게 선의의 거짓말조차도 못하도록 철저히 교육시켜오고 있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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