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봉제와 포괄연봉제의 사이에서
내가 몸담았던 업계는 호봉제다.
한 해 한 해 잘 버텨내고 나면 그래도 조금씩 알아서 급여가 오른다는 뜻이다.
급여체계가 공무원을 따라 책정되어 그런지, 기본급 자체는 낮지만 명절수당, 정근수당, 자격수당, 교통비, 식비, 야근수당,, 등등 수당의 명목으로 급여에 붙는 항목들이 꽤 있는 편이다. 하지만 해마다 임금 인상률은 1%를 겨우 넘겼다.
1~3년 차 때는 급여가 오르는지 티도 안 나더니 5년 차가 넘어가니 조금씩 차이가 나는 게 눈에 보였다. 그때 나는 5년 차였다.
수당이 포함된 급여라 내 연봉이 어느 정도인지 몰랐는데, 퇴사하며 원천징수 영수증을 보고서야, 아 내 연봉이 이만큼이구나. 깨달았다.
쫓겨나듯 퇴사하고 나니 그 업계는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 업계를 벗어나니 ‘포괄연봉제’라는 걸 경험해야 했다. 빛 좋은 개살구 같은 포괄연봉제는 야근도 많으면서, 직전 연봉보다 400만 원이나 내 가치를 떨어트렸다. 그럼에도 그 회사를 선택했던 건, 이제 그만 취준생 신분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새로운 조직을 경험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400만 원은 내가 그 회사를 내 발로 나오게 된 가장 큰 이유가 되었다.
호봉제의 업계에선 직전연봉을 묻지 않았는데, 포괄연봉제에서는 직전연봉을 늘 묻는다.
그럴 때면 스스로 괜히 더 작아지는 기분이 든다. 마치 그게 나의 가격표인 것처럼, 그래서 그 이상의 가치를 붙이고 싶다고 말할 수 없을 것 같았고, 말하더라도 그 가격표를 내게 붙여주지 않을 것 같은 압박감이 느껴졌다. 그래서 이직을 선택할 때 그 이후를 생각하게 된다. 다음 회사에서 직전연봉을 묻는다면 나는 당당할 수 있을까? 그 이상의 가격표를 내게 붙일 수 있게 될까. 언제부터 그런 가치가 내게 중요해졌는지는 알지도 못한 채로.
내 직업을 누군가에게 설명할 때면 늘 돌아오는 말은 “좋은 일 하시네요”였다.
그 말이 좋으면서도 불편했다. 내게 직업을 선택하는 1순위가 돈이 아니었음에도, 그 말은 나를 불편하게 했다. 좋은 일 하면서 돈도 많이 벌 수는 없는 걸까. 좋은 일 하는 게 나의 전문성은 아닐 텐데.
다음 스텝을 앞두고 다시 그 연봉이 내 발목을 잡는다. 해가 지나면 급여가 오르는 그 호봉제의 울타리에 있었다면, 지금이면 내 연봉이 얼마였을까 계산해 보니 그 자리에 계속 있었어야 하나 하는 후회 같은 마음이 든다. 그래서 괜히 블라인드 같은 곳을 기웃거리며 요즘 다른 업계의 초봉은 어느 정도인지 살펴보게 되는데, 어차피 나는 사회적으로 돈 많이 받는 직업으론 갈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스스로에게 만족스러운 급여의 선을 그어두고, 그 이외에, 다른 것에서 만족을 찾으면 되지 않을까. 누군가에겐 그게 워라벨일 수 있고, 누군가에겐 복지일 수도, 누군가에겐 승진 가능성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현재의 나는 그냥 해야 해서 하는 일이 아니라, 즐겁고 재미있게 일하는 마음과 동료들을 얻고 싶은 것 같다. 물론 아직도 연봉을 아예 포기하진 못한 것 같지만, 그럼에도 나는 정해진 예산을 잘 사용하는 사람이니까, 나만의 선을 잘 찾아 그어 그 회사에 들어가 봐야겠다, 는 생각을 문득 뱉어본다.
근데 진짜 나만 해가 갈수록 연봉이 깎이고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