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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기로운 생활 Mar 20. 2021

유통기한 지난 치약을 썼을 때

자취하면서 충격적인 순간이 있다.

화장지를 내 돈으로 살 때.

샴푸를 내 돈으로 살 때.

쌀을 내 돈으로 살 때.

전기세를 낼 때.

가스비를 낼 때.

엄마 아빠와 함께 살 때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다.

자취생활이 오래되면서 이런 일에 익숙해졌지만.

아직도

익숙지 않은 것이 있다.  

치약을 사는 것.  

치약이란 으레 항상 집에 넘치는 것이었다.

떨어질 일이 없는 것이었다.  

그 치약을 내 돈으로 살 때란.

아, 충격적이다.

어떻게 있는 치약으로 버티다가

본가에 남아도는 치약을 왕창 들고 왔다.

가져온 치약을 쓰려고 보니

이거 유통기한이 하나같이 지난 것 아닌가.

날짜가 하도 지나면 이제 이것이 연도를 뜻하는 것인지 일자를 의미하는 것인지도 헷갈린다.

한쪽이 31이면 명확하지만, 20이나 15가 함께 있으면 고민은 시작된다.  

약국에서 재고 채우는 원칙은 선입선출이다. 유통기한이 짧은 것부터 쓴다. 물론 유통기한이 지난 것은 폐기 처분이다.  

이것을 치약에 적용했다.

더 오래된 것부터 쓰기.

17년인가 19년인가를 쓰기 시작했다.

15년인 것은 교정기 씻을 때 사용했다.

날짜가 지나도 치약 효능은 별 상관없겠지 하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별 일 없이 썼다.

써야 할 치약이 많았다.

언제 다 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쓰기 한 달쯤 되었을까.

어느 날부터 이가 아프기 시작했다.

어금니 쪽이 아프기 시작했다.

진미채를 너무 씹어먹어서 이가 아픈가.

보리굴비 가시가 이에 꼈나.

자려고 하는 데 어금니가 찡 했다.

앗, 이건 아니다.

이가 무슨 일이 났나 보다.

유통기한 지난 치약 썼다고 설마 이러진 않겠지.

조금 의심이 들긴 했지만.

3.1 절 전날 밤 아파서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연휴에 여는 치과를 찾았다.

아, 다행이다.

정말 연휴에도 일하는 사람들은 천사다.

치과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은 후

의사 선생님 말씀.

의심이 되는 치아는 몇 개 있지만,

정확히 알려면 금박을 다 벗겨야 한단다.

컨디션이 원인일 수도 있다고.

이가 원인이면 점점 더 아파질 것이라고.

통증이 더 심해질 것이고.

문제 부위가 더 확실해질 것이라고.

지켜보자는 말을 듣고 돌아왔다.

어쨌든 의사 선생님을 만나 안심은 됐다.  

그런데, 아무래도 유통기한 지난 치약이 의심된다.

유통기한을 정해둔 데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물론 날짜 지난 요플레도 가끔 먹긴 한다.

화장품도 종종 쓴다.  

그러나 치약. 날짜가 너무 오래됐다.

이게 원인일 수도 있기에 아깝지만 모두 버렸다.  

그리고, 구.매.했.다. 치약을.

1+1으로.

치약을 바꾸고 나니 이가 안 아파온다.

3월 20일인 오늘 이가 괜찮다.

치약이 제 역할을 해줬기에 여태 잘 지내온 것이다.

날짜란 중요하다.

인생에서 in time 이란 무엇이든 중요하다.

치약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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