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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아 Jun 08. 2019

어쩌겠어, 여긴 리스본인데!

여행을 시작하는 마법의 주문

 


 쫓기는 기분이었다. 인천공항에서부터 뒤통수가 근질근질했다. 혹시 뭘 두고 온 건 아닌지 부산스레 되짚어 봤지만, 워낙에 꼼꼼하지 못한 성격이 뭘 되짚는다고 생각날 리 없었다. 나 같은 부류의 사람들에겐 '혹시 뭐 잊어버린 건 없는지 생각해 봐'라는 질문이 소용없다. 잊어버린 걸 잊어버리는 걸. 물론, 내 여행 동반자 겸 사실상 보호자인 수진이 워낙 꼼꼼하게 (잔소리하며) 짐을 챙겼기 때문에 두고 온 게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이 찝찝함이 리스본에 도착하면, 숙소에 체크인하면, 하룻밤 자고 나면, 그러면 사라질 줄로만 알았다. 다음날, 생각보다 일찍 눈이 떠졌다. 아침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기계적으로 우유를 부어 시리얼을 말아 씹었다. 그리고 핸드폰으로 서울의 시간을 확인했다.



 버려두고 와야 했던 몇 가지 걱정거리들이 운동화 밑창의 껌처럼 들러붙어있었다. 몸은 리스본에 정신은 안산과 인천, 서울 어딘가에 흩어져서 부유하고 있었다. 정신이 동시에 여러 곳에 있을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생겼지만 더 이상 생각하는 건 관뒀다.

 리스본 거리는 타국에서 온 여행자들로 붐볐다. 도시의 초여름을 만끽하는 사람들 틈바구니에 나도 끼어들고 싶었다. 그러나 그때의 나는 서울에도, 리스본에도 있지 않았다.







 패키지여행 버금가는 하루를 보내고 수진은 숙소에 오자마자 침대로 직행했다. 잠이 오지 않았다. 이 와중에 시차 적응도 망했다니. 진짜 망했네. 침대에 누워서 하루 동안 찍었던 사진을 툭툭 넘겼다. 사진 속 나는 이렇게나 평화롭다니. 그러다 문득, 사진 하나가 눈에 걸렸다.


 알파마 지구를 배회하다 찍은 사진이었다. 신경 써서 찍은 게 아니었는지 주변에 걸리는 인물들이 너무 많아 정신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 아닌 밤 중에, 사진을 보다 낄낄 웃음이 터졌다.

 사진 속 노부부는 사뭇 진지한 얼굴을 마주 대고 있었다. 알파마의 이름 모를 노천카페. 쏟아지는 더운 햇볕과 두 잔의 와인을 주문한 유일한 손님들. 그들 덕분에 나는 행복해지고 말았다. 정확히는 그 테이블 옆에 놓인 칠판 때문이었다.







 Smile. You are in Lisbon.

 아니, 저런 문장을, 저렇게 사랑스러운 문장을 대문짝만 하게 써놓은 카페라니.

 어쩌면 그건 마법의 문장 같은 거였다. 반세기 가까이 함께 산 눈 앞의 남자가 오늘도 똑같은 실수를 반복해도. 한 마디 쏘아붙이려는 찰나, 눈에 보이는 순간 헛바람을 들이켠 웃음에 와인 한 모금을 섞어 삼켜버리게 만드는 마법의 문장.



 그때 알았다. 이곳에서 내가 해야 할 유일한 일이라면 그저 웃는 것이라는 걸.







 여행자에겐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원래의 세상이 있다. 그곳엔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들이 여행자가 일상으로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다. 그럼에도 떠나온 이상 여행자의 본분은 그곳의 하루만큼 행복해지는 것. 오지 않은 미래에 골머리를 썩는 건, 여행 전에도 충분했고 여행 후에도 넘칠 것이다.


 이 도시에서 충분히, 질릴 만큼 행복해야 한다. 그럴 때에 비로소, 우리는 다시 돌아갈 곳이 미워지지 않는다. 의무와 책임이 덜어진 이곳에서, 우리는 행복을 연습하는 것이다.



 그러니 여행을 시작할 때 필요한 건 다른 게 아니다. 그저 일상과 일상 사이에 끼어든 이 도시 속, 우연히 눈이 마주친 누군가를 따라 웃어버리며 마법의 문장을 외우는 일.



 그래, 다 무슨 상관이야. 여긴 리스본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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