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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아 Jul 30. 2020

과일이라는 사치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핸드폰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수박이 먹고 싶었다. 그정도의 강렬함으로 뭔가를 먹고 싶다는 감정이 처음도 아니고, 솔직히 너무 자주 있는 일이지만, 그게 수박인 적은 없었다. 왜 수박을 먹고 싶은 생각이 드는지 보다 왜 지금 수박을 먹을 수 없는 건가에 대한 화가 먼저였다. <9호선에서 수박 먹는 사람> 같은 제목으로 영상 찍혀서 돌아다니고 싶은 게 아니고서야. 지하철에선 음식 섭취가 금지이고 더군다나 물 뚝뚝 흐르는 수박을 밖에서 와작와작 먹는 건 안된다는 지극한 상식은 그 순간 내게 없었다. 당장 수박이 필요했다. 어찌나 강렬한 식욕이었는지 순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드디어 미쳤군. 병원을 가야할까. 솟구치는 감정을 기록하려고 와중에 메모장을 켰다.




[메모]

수박이 먹고 싶다. 근데 수박을 못 먹어서 눈물이 난다.




 수박이라는 단어를 쓰는데도 눈물이 났다. 아주 지랄이다 지랄. 수박이랑 연애하니? 이 비상식적인 감정 폭발의 원인은 하나였다. 생리 첫날. 역시 생리는 정신 건강에 하잘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과일이 아니라 호르몬에 휘둘리는 걸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양 옆에 앉은 사람들은 몰랐을 폭풍 같은 감정을 가라앉힌 채 집으로 향했다.


  엄마 집에 가면 수박을 먹어야지. 겁나 양껏 먹을 거야. 40km는 떨어진 냉장고의 속사정을 알 리 없음에도 확신이 있었다. 집에 가면 수박이 있을 거라고. 여름만 되면 우리 집 냉장고엔 늘 커다란 락앤락 통이 정 중앙을 차지하고 들어서 있다. 깍둑 썰려 가지런히 담겨 있는 빨갛고 네모난 수박. 아무 때나 먹기 좋으라고 엄마가 일일이 잘라둔 수박은 그냥 꺼내기만 하면 됐다. 그 두꺼운 껍질을 자르려고 힘을 써본 적도 없고, 빨간 속을 내어 놓고 쓰레기로 남은 것들을 치우느라 손을 더한 적도 없다. 그런 대가를 치르지 않고도 나는 엄마의 냉장고 속을 누렸다.

 


 엄마의 냉장고와 달리 나의 냉장고는 모든 것이 어설프다. 에너지 효율 5등급짜리 가전을 문짝 4개 달린 4인 가족용과 비교하는 자체가 어불성설이지만서도, 원룸의 옵션으로 딸린 냉장고는 '허접스럽다'라는 말이 딱이다. 어디서 본 정보인지, 맞는 정보인지도 모르겠지만 냉장고 문을 자주 열고 닫으면 냉장고에서 켜지는 불 때문에 야채가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밤 중에 물이라도 꺼낼라치면 전등을 켜거나 핸드폰 라이트를 켜야 하는 이 허접스러운 냉장고의 유일한 장점이었다. 알고보면 야채전용 냉장고일지도 모르지.


 어설프고 허술한 냉장고는 속도 그렇다. 딱 한 사람이 일주일 정도 먹을 수 있는 분량의 식재료. 엄마에게 받아온 지 일 년이 다 되어가는 갓김치와 양파 장아찌. 그리고 제발 좀 챙겨 먹으라고 들려 보낸 몇 개의 즙들. 엄마도 내가 이걸 먹을 거라고 생각하고 준 건 아닐 거야. 지퍼백에 가지런히 담긴 석류즙 쪽으로는 최대한 눈을 돌리지 않고 냉장고를 쓴다.


 봄에는 딸기를 두 번인가 샀다. 한 번은 딸기 청을 만들겠다고 동네 마트에서 9천 원인가를 주고 1키로를 이고 왔는데, 보통 딸기청을 만들 때 500g 정도를 소분해서 쓴다는 사실은 만들고 난 다음날 동생이 말해줬다. 어쩐지, 담을 병이 부족하더라니. 만드는 과정에서 뭘 잘못했는지 채 먹지 못하고 남은 청의 표면엔 2주 정도 지나자 하얀 것들이 둥둥 떠올랐다. 곰팡이 이 새끼는 진짜 날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네. 그게 내가 많은 양의 과일을 사들인 마지막 기억이다. 먹는 것보다 버리는 게 더 많을 수박, 그건 정말로 내 돈 주고 살 일은 없겠지. '어, 수박도 요새 잘라서 나와요!'. 회사 동료가 링크를 보내줬다.




- 엑, 이거 누구 코에 붙이라고 이 양에 이 가격이에요ㅋㅋㅋㅋㅋ

- 그쵸? 근데 사는 사람이 있긴 하더라고요.

- 솔직히 5분 컷.

- 전 1분 컷.




 깨끗하게 잘려 플라스틱 통에 담긴 수박의 가격은 6,900원. 혼자서도 편하게 수박을 즐기라는 상품 설명 문구는 어딘가 아이러니 했다. 편하게 즐기라니, 가격 생각나서 먹다 체할 거 같은데요. 한 알 씩 먹을 때마다 500원씩 씹어 삼기는 기분이 들 것 같은 수박을 보다 미련 없이 창을 껐다.


 본가에 가자마자 냉장고 문부터 열었다. '니 배고프나' 묻는 엄마의 물음이 따라왔다. 그리고 냉장고엔 어김도 없이 그게 있었다. 큰 락앤락 통, 그걸 가득 채운 빨간 수박.




- 엄마 나 이거 먹는다?

-그거 옆에 작은 통, 그거 니 먹으라고 따로 잘라났데이.




 참나 같이 사는 것도 아닌 딸 수박은 왜 따로 잘라뒀대. 냉장고 안에 매운 거라도 들었나. 코가 매웠다. 생리도 끝났는데 왜 난리야 진짜. 하여간에 수박 하나 때문에 올 여름은 눈만 여러번 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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