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의 나의 모습과 40년의 나의 삶을 돌아보면 가끔 나는 나의 아이들에게 정직과 성실, 선하게 사는 삶에 대해 가르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한 삶이 나의 아이들에게 꽃길을 걷게 해주는 기본 바탕이 되어줄까? 그렇다고 자녀에게 나의 이득을 위해 적당히 다른 사람의 것을 뺏기도 하고, 거짓말도 하고, 때로는 기회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 맞는 것인지도 잘 모르겠다. 고등학교 도덕 시간에 내가 발표했던 사람의 본성에 대한 답변대로 라고 하면 나는 나의 아이들이 선한 본성을 가지게 하기 위해서는 정직과, 성실, 선한 삶을 추구하는 가르침을 주어야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교육으로 나의 아이가 선한 본성을 가진 어른이 되었을 때 그들이 원하는 것을 누리고 살 수 없게 만들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면 나는 살짝 두려움이 밀려온다.
물론 기회주의적으로 산다는 것이, 이기적으로 산다는 것이 악한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득 보다 나의 이득을 먼저 생각하고 남에게 나의 것을 뺏기지 말아야 하며 때로는 필요 따라 남의 것을 뺏어야 할 때도 있다는 교육 방식이 틀렸다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요즘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는 다소는 기회주의적이고 다소는 이기적으로 사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마치 과거 우리 아버지 세대 때 삼국지의 유비를 훌륭한 리더, 조조는 간신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우리는 조금은 다른 가치관에서 그 두 주인공을 바라보는 것처럼 말이다.
단지 나는 새하얀 도화지 같은 우리 아이들에게 처음부터 채도가 너무 낮은 검정, 회색이 칠해지기보다는, 채도가 너무 높은 원색적인 색으로 칠해지기보다는 조금은 순수하고 자극적이지 않으며 때 묻지 않은 파스텔 톤의 다채로운 색들이 칠 해지기 바랄 뿐이다. 우리 아이들이 노력과 성실한 삶 속에서 나에게 다가 온 기회를 누군가에게 양보하기보다는 내가 적극적으로 취했으면 좋겠고, 나의 이득을 남에게 나누어 주는 마음을 가지되 내가 필요할 때는 상대에게 적극적으로 표현하여 다른 사람의 것을 정당하게 취했으면 좋겠다. 남들에게 손가락질 당하는 기회주의자, 이기주의자가 되기보다는 주변의 칭찬을 받되 나의 성공을 위해서는 영리함을 갖는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어차피 하얀 도화지 위로 검은색이 칠해져야 한다면 우리가 초등학교 미술 시간에 해봤던 다채로운 색깔을 칠하고 그 위에 검은색을 칠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하면 우리가 모두 알다시피 시간이 지나 뾰족한 긁힘과 상처가 오히려 더 예쁜 색감을 만들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선함과 악한 본성을 모두 가지고 태어난 아이들에게 선함을 가르쳐 그 본성을 선하게 만들겠다는 나의 생각 자체가 처음부터 틀렸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누군가의 본성을 바라볼 때 선함과 악함을 구분하는 것 또한 맞지 않을 수도 있다. 각자 살아온 환경과 과정이 다르기에 그 개념 또한 상대적이기에 같은 사람을 바라보더라도 누군가는 선한 본성이 더 보일 수도 있고 누군가는 악한 본성이 더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나의 아이들에게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쳐야 될지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누가 보더라도 성실하고 선한 사람으로 평가 받으면서도 나의 것을 쟁취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독하게 지킬 줄도 아는 성인으로 성장하기 바라는 것은 나의 비현실적인 욕심인 것일까? 어쩌면 나의 이득보다는 남을 배려하려고 노력하고 나의 생각보다는 남의 생각을 중요시하고 노력과 성실이 삶에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던 나의 40년 삶이 우리 아이들에게 바보 같은 인생으로 비추어 질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나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정말 나의 40년 삶이 바보 같은 삶이었을까? 아직은 이 질문에 대해 쉽게 단정 지어 답을 내 놓고 싶지는 않다. 물론 나에게 주어진 기회를 주변 신경 쓰다가 놓치고 내가 손해를 봄에도 다른 사람의 상처가 무서워 쉽게 쳐 내지 못 했던 삶은 조금 후회한다. 하지만 나는 이 바보 같은 삶을 조금 더 살아 볼까 한다. 지금은 조금 후회스러운 인생이었지만 어쩌면 훗 날에 나의 아이들에게 "나의 삶에 후회는 없다."라고 이야기 해 줄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작은 희망 또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