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가신 그 날
앞으로의 수없이 많을 이별의 시작,
내게 하나뿐인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날이 좋아도 너무 좋아서
집 안에 있지 못해 모두가 바깥에 나와 새로운 계절을 만끽하던 날
그런 날에,
그렇게 아름다운 날에
그것도 가장 따뜻한 오후 두시 반에.
그나마
예정된 이별이었다.
한 주 전쯤,
가족 전부 다 내려오라는 연락을 받고
부랴부랴 KTX를 타고 달려갔다.
그때까지는 몰랐다.
노래도 듣고, 밀린 작업도 하고, 그랬다.
얼마 가지 못하실 거라 들었는데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병원 가는 길
"니 절대 할아버지 보고 울지 마래이. 알긋제"
늘 쿨한 큰이모의 한마디에
괜히 차 안에서 울컥해서 그랬는지
할아버지를 뵀을 땐 오히려 담담했지만
가슴은 놀라 쿵쾅거리고 있었다
내가 상상한 할아버지의 모습이 아니었다
가장 최근에 기억한 할아버지의 모습이 아니었다.
절망스러웠다
늦었다는 사실이 물밀듯이 밀려와
나를 쓸어다 내동댕이 치듯.
그나마 예정된 이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더 일찍, 좀 더 먼저 알 수 있었을 텐데
좀 더 정정하실 때 찾아뵐 수 있었을 텐데
그 후회는 아마
할아버지를 기억할 때마다 박힌 가시마냥 쿡 쑤실 것이다.
내가 모르던 사이
이미 2주 전부터 입원했던 할아버지는
그 시간동안, 고된 병원생활에 기가 다해
눈은 풀리고, 거동은 불가능한 상태로
그렇게 중환자실에 누워 계셨다.
애써 태연한 척하며
할아버지 저 왔어요 했지만
기대했던 그 목소리가 아니었다
의식은 정정하셨지만
마음대로 소리도 못 내실 만큼
기력이 빠져있었다.
이모들, 외삼촌 앞에서는 도저히
울 수가 없어 애써 미소를 지었다
얼마나 고생하셨겠냐고
돌아오는 미소에 너무 많은 말들이 묻어 있었다.
다행히 그 날은 한 고비를 넘겼다
뒤늦게 내려온 우리 엄마까지
우리가 하룻밤 병원에서 자고 가서 그런지
다음날 할아버지는
한 숟가락도 채 드시지 않던 죽을
다섯 숟가락을 드시고
평소 버릇처럼 하셨던 입운동을 하시고
병원 침대를 올려라, 내려라 연신 반복했다.
하루 전까지
숨도 잘 못 쉬시고
말씀도 잘 못하셨던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 이제 좀 기운이 도시나 보다.
서울 가는 길 그나마 마음 편히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저희 갈게요,
느그 가나,
네, 할아버지 어서 나아서 서울 같이 가요 또 올게요
오냐, 밥 잘 묵그래이.
그땐 왜 몰랐을까,
그게 마지막 말씀일 거라는 걸
알면서도 모른척 돌아선 내가 원망스럽다.
마지막이라는 걸 끌어 안고
더 그 시간을 온전히 느꼈어야 했는데
가물가물했던 할아버지의 마지막 한 마디에
더 잘 대답 해드릴걸
손 더 꼭 잡아 드릴걸
꼭 안아 드릴걸.
괜히 마지막이라는 느낌이 들까봐
안 했던 행동들이 생각나
비수처럼 가슴을 파고 지나간다
할아버지는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식사를 너무나 잘 하셔서
이모들과 외삼촌은
다시 일어나시기만을 바라고 있었던 거 같다
나도 그러기를 바랐지만,
그렇게 잘 드시고
돌아가실 힘을 마저 만들고 계셨던 거였다
잘 돌아가실 수 있는 힘.
마지막 날에는 이모가 병원 밖을 세 번이나 다녀올 만큼
드시고 싶은 게 확고하셨고
그걸 다 드시고,
어느 따뜻한 오후2시 반
큰이모가 병실 침대에 기대 까무룩 잠이 들려 할 즈음
숨을 크게 들이쉬면서
육신을 버리셨다고 한다.
호상 중에서도 호상이었다
향년 아흔셋.
살아계실 때도
언제나 꼿꼿한 자세로
주위에게 늘 격려와 좋은 말씀을 아끼지 않고
당신의 삶 역시 곧게 사신 분이
가실 때까지
자식들 손주들 누가 되지 않도록
그렇게 아름답게 가셨다.
장례를 치르는 3일 내내
날이 좋아도 너무나 좋았다.
장지하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까지
꽃비를 뿌려주시며
자식들 돌아가는 길 살펴 주셨다.
모두가 부러워했다.
날까지 잘 골라 가셨다며
나도 이런 날 가면 얼마나 좋을까, 하며.
5년 전 즈음
할아버지 뵈러 갔을 때였다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셔야 해요
오냐, 느그들도 늘 건강해야 한다
내는 한 5년은 잘 살다가 갈 거 같다
사람은 자기가 가야 할 때를 안다는 말
나는 믿는다
우리 할아버지가 그렇게 가셨기 때문에
내 삶을 내 의지로 끝맺으며 가는
그 존엄을 지키고 가실 수 있어서
손녀는 그래도 마음이 편했어요, 할아버지.
장지에서 첫 제를 올릴 때
먼저 가신 할머니가
할아버지 마중 나오는 환영을 봤다
두분 함께 나란히
그곳에서 극락왕생 누리시옵소서
따뜻한 이별을 가르쳐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사랑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