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광주에서 경상남도 통영으로 가는 버스 안, 남해안고속도로를 달릴 때 느껴지는 우리 국토의 멋은 '능선의 아름다움'입니다. 첩첩이, 그리고 빼곡히 뻗어 있는 산들의 연속성과 어느것 하나 똑같지 않은 그 개별성이 만들어 내는 선과 색의 조화는 아무리 뛰어난 예술가도 만들어 낼 수 없는 창조자의 절대성을 느끼게 해 줍니다.
그 가운데서 '어떻게' 이렇게 만들었는지, '왜' 이렇게 만들었는지를 묻는 것은 어리석은 질문이 되고 맙니다. 그저 이 모든 것을 볼 수 있고, 밟을 수 있고, 살 수 있도록 주어진 특권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뭐가 그리 바쁜지, 뭐가 그리 두려운지, 뭐가 그리 부족한지, 이 모든 특권을 포기하며 살아가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이 특권을 포기할 만큼 지금 나의 삶이 더 가치가 있는지 자문해 보게 됩니다. 늘 급한 일들로 쫓기며 사는 것에 생의 시간이 다 소진되어 버릴까 두려우면서도 그것을 이겨낼 능력이나 용기마저 잃어 버릴까 걱정이 됩니다. 하지만 지금 이 시간 만큼은 주어진 특권에 감사하고, 용기 낸 나의 발걸음에 박수를 보내주고 싶습니다.
여행에서 날씨가 중요한 이유는 '하늘' 때문입니다. 하늘은 여행에 있어서 배경화면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멋진 산과 들과 조형물이 눈 앞에 있다해도, 하늘이 빛나는 배경과 조연을 맡아 주지 않으면, 사진도, 기분도, 시야도 모든게 흐려지고 맙니다. 하늘은 자신이 주인공은 되지 않아도, 다른 주인공을 더욱 주인공답게 해주는 존재인 것 같습니다. 밤엔 달과 별을 위해 자리를 비켜주는 겸손함까지 갖추었지요. 하늘의 높음은 이런 따뜻한 성품을 갖추었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래서 하늘을 닮은 좋은 벗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주변의 사람들에겐 밝고 맑은 하늘같은 사람이 되어주고 싶습니다.
"삼도수군통제영"에 가면 '국보305호'라는 타이틀을 가진 '세병관'이 있습니다. 현재 남아있는 조선시대 목조건축물 중 바닥면적이 가장 넓은 건물 중 하나라고 합니다. '세병'이란 '만하세병'에서 따 온 말로 '은하수를 끌어와 병기를 씻는다'라는 뜻으로 굉장히 낭만적인 표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세병관을 보면서 내 마음이 따뜻해졌던 건 다른 이유 때문입니다. 여느 문화재와는 달리 세병관을 방문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신발을 벗고 그 안에 들어갈 수 있다는 점 때문입니다. '만지지 마시오', '들어가지 마시오' 더 심한 곳은 '촬영 금지'까지 안된다는 푯말만 잔뜩 보아 오다가 느닷없이 국보 안을 활개치며 다닐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덥고 지친 관람객들은 마루에 걸터 앉아 쉬기도 하고, 아이들은 기둥 사이를 뛰어다니며 장난을 칩니다. 중앙에 앉아 사진을 찍는 사람들도 있고, 단체 관광객들은 아예 이 안에서 편하게 앉아 가이드의 설명을 듣습니다. 모든 문화재가 다 그럴수는 없겠지만 사람 손을 타야 더욱 튼튼해지고 오래 갈 수 있는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모든 이들의 손과 발을 환영하는 세병관은 사랑하는 손자, 손녀를 받아주는 인자한 할아버지를 닮은 것 같습니다. 저도 잠시 그 품에 안기어 세병관 할아버지의 무병장수를 기원해봅니다.
동피랑 벽화마을은 이제는 너무도 유명한 명소가 되었기에 비수기 임에도 많은 이들이 찾는 곳입니다. 소심한 노총각이 하나하나 음미하며 감상하기엔 길도 너무 좁고, 커플이나 아주머니들도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부끄러움이 많은 나는 셀카도 찍지 못하고, 그저 빠른 걸음으로 눈동냥만 하게 됩니다.
담아내야 할 사진에 대한 부담을 내려 놓아서인지, 벽화보다는 마을 자체가 더 눈에 들어옵니다. 벽화가 하나도 없는 마을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아무에게도 관심과 사랑을 받지 못하는 달동네가 그려집니다. 어렵고 힘든 이들에게 벽화는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내 따뜻한 정과 순박한 정직함마저 없애는 전환점이 되지는 않기를 바래봅니다. 편안한 삶을 추구하며 달려오다보니 평안한 마음은 저 멀리 두고 오지 않았는지, 더 늦기 전에 모두가 뒤돌아볼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통영의 '해저터널'은 지금껏 가 본 여행지 중에 가장 허무한 곳이 될 뻔 했습니다. 그냥 지하도를 건너는 것 이상의 어떠한 것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관광적 요소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뭔가 속았다거나, 농락당한 기분이 들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터널 중간쯤에 붙어 있는 이 터널의 역사를 보고 놀랐습니다. 이 해저터널은 일제시대에 건설된 동양 최초의 해저터널이었던 것입니다. 갑자기 터널을 대하는 나의 자세가 달라집니다. 일제시대 당시에 이 터널 속 풍경을 상상하며 걸으니 새로운 감회가 밀려옵니다.
해저터널에서의 이 경험은 '무지'가 줄 수 있는 여행의 허망함과 '의미'가 줄 수 있는 여행의 풍성함을 극명하게 대비시켜 주었습니다. 터널의 모습과 존재 자체는 아무 변화가 없었지만, 그 터널을 바라보는 나의 모습은 180도로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여행이라는 것이 "어느곳을 가느냐"보다 "어떠한 나로 가느냐"가 그 풍성함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KEY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유독 아침잠이 많은 제가 새벽부터 배를 타기 위해 부지런을 떨었습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방울은 가늘지 않고, 그칠 기색도 없어 보입니다. 하늘은 부지런히 회색빛을 만들어내고, 바다는 그 빛을 부지런히 반사해내고 있을 뿐입니다. 그 중간에 끼어있는 애꿏은 작은 섬들만 숨 죽이고 바짝 엎드려 있는 모습입니다.
텅 빈 커다란 여객선 갑판 위에서 끝없이 등장하는 섬들을 보며 홀로 감탄합니다. 캐나다의 천섬도 아름답고, 하노이의 하롱베이도 아름다웠었지만, 우리만의 멋을 내는 한려수도의 모습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자부심이 밀려옵니다. 천편일률적으로 모방하고 흉내내기에 바쁜 이 시대에 모방할 수 없는 자연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참 감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모두도 그런 존재로, 그런 모습으로 창조된 사람들입니다. 나도 나의 멋과 빛을, 있는 그대로 발현해 낼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통영항에서 배로 한시간 즈음 거리에 있는 연화도.
비수기 비바람이 부는날에 이 섬을 찾아온 나는 오롯이 섬 전체를 독차지 하는 존재가 됩니다. '연꽃이 되어버린 섬'이라는 뜻의 연화도는 슬픈 사연이 많아 보입니다. 또한 그런 사람들을 초대하는 섬 같아 보입니다.
비바람을 두려워하여 30분 남짓 부두에서 고민을 하다가 예정대로 산행을 하기로 결심한 것은, 결과적으로 위험을 감수한 나쁘지 않은 선택이 되었습니다. 연화도의 구석구석을 일대일로 깊이있게 대면하는 특별한 시간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날씨는 아주 짓궂었지만, 연화도의 아름다움을 감추지는 못했습니다.
연화봉에 오르자 통영8경의 하나인 '용머리해안'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진짜 용머리를 닮은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가슴이 터질듯한 짜릿한 감동과 전율이, 미처 준비하지 못한 온 몸으로 갑작스럽게 퍼져 나갑니다.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하고 어떻게든 이 감동을 '테이크아웃'해보려 하지만 이내 포기하게 됩니다. 이 풍경이 아름다운 것은 이 자리에서밖에 볼 수가 없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 감동을 온 몸으로 경험하기 위해서는 직접 이 곳에 서는 수밖에 없습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계속 섬의 산행로를 걷다보니 강진에 이어 또다시 '출렁다리'가 등장합니다. 요즘은 '출렁다리'라는 이름이 유행인가? 라는 비꼬는 마음이 들던 찰라, 이 다리는 정말로 출렁였습니다. 그것도 꽤나 많이.... 덜컥 겁도나고, 몸과 마음이 덩달아 출렁거렸습니다. '출렁다리'라는 이름이 그저 허울뿐인 유행은 아닌었나 봅니다. ^^;
연화도의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가면 작은 마을이 하나 나옵니다. 산등성이 위에서 바라보는 이 작은 '동도마을'은 너무나 소박하고 귀여운 모습에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게 됩니다. 그 곳엔, 가장 그곳다운 마을이 있기에 가장 아름다울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분에 넘치게 치장하고 욕심을 내는 곳이나, 사람들은 이곳을 보며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동도마을 뒤편엔 작은 몽돌 해수욕장이 있습니다. 너무나 투명하고 깨끗한 물 속에 슬며시 발을 담구어 봅니다.
그런데.....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 앞에 무분별하게 버리고 간 관광객들의 쓰레기라니... 아름다운 자연에 감동하고, 이기적인 사람들의 흔적에 분노함을 느낍니다. 이럴 땐 우리나라 사람들이 너무나 창피해 집니다. 아름다운 이 땅을 풍요롭게 즐기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고, 아름다운 이땅을 끝까지 지키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