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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도 Sep 02. 2024

난초의 죽음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해


몇 달 전, 아버지가 연락도 없이 나에게 화분을 하나 보냈다. 내가 사업자 등록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 써서 보내준 선물이었다. 그것은 선물임에는 분명했지만 나는 마냥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몇 해 전부터 아버지와 나의 사이가 꽤나 서먹해졌기 때문이었다.


“회사 그만두지 말아라.”

“그만둘 거면 로스쿨 가는 건 어떠냐.”

“아니면 사업을 해서 대박을 터뜨리던지.”


내가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말했을 때, 아버지는 무표정한 얼굴로 이런 말들을 하셨다. 아버지의 눈에는 내가 낙오자 아니면 ‘중도에 포기한 사람’ 정도로 보이는 것 같았다.


일을 그만둔 지 1년이 넘었을 때까지도 아버지는 당신의 친구들에게 내가 퇴사했다는 걸 얘기하지 않았다. 자신의 딸이 꽤 괜찮은 회사에 다닌다는 것은 아버지의 몇 안 남은 자부심이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자부심 일부가 무너졌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는 나에 대해 늘 지나친 기대를 하곤 했다.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친구들과도 두루두루 잘 지내기를 바랐던 것 같다. 나는 뭐든지 열심히 했다. 아버지의 기대에는 매번 못 미쳤지만.


아버지와 나의 사이를 한 문장으로 정의해 보자면, '서로 사랑하기는 하지만 둘만 남으면 너무나 어색한 사이' 정도일 것이다. 우리 둘 사이에는 늘 거대한 기대감이 자리하고 있었다.


-


띵동, 하는 소리에 문을 열었다. 회색빛 얼굴의 낯선 할아버지 한 분이 분홍색 리본으로 과하게 포장된 난초를 품 안에 조심스레 안고 있었다. 그는 내 이름을 확인하고는 나에게 소중한 아기를 안겨 주듯이 난초를 건네주었다. 난초는 보기보다 훨씬 더 무거웠다. 나는 그 묵직한 화분을 받아 들면서 동시에 아버지의 거대한 기대감을 떠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난초는 다른 식물들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우리 집에는 이미 여러 식물들이 자라고 있었다. 사실 그 전의 나는 오랫동안 키우는 식물을 족족 죽이는 식물 킬러였다. 아무리 생명력이 좋다는 식물도 내가 키우면 한 달을 채 가지 못 했다. 그런 나였는데, 이상하게도 이삼 년 전부터는 내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식물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고무나무 하나는 자꾸만 위로 뻗어가서 이제 거의 내 키에 가까워졌고, 또 다른 식물은 거실의 한 구석을 다 차지하겠다는 심보인지 옆으로 옆으로 자꾸만 자라나고 있다. 무거운 난초를 화려한 식물들 사이에 두었더니, 사군자의 위엄은 어디로 가고 왠지 모르게 처량해 보였다.


그러고 나서는 한동안 식물들을 신경 쓰지 못했다. 키 큰 두 녀석은 알아서 잘 자라났고, 작은 식물 몇 개도 각자의 색깔을 한껏 뽐냈다. 그래서 정말 늦게 알아차렸다. 생명력 가득한 식물들 사이에서 난초가 천천히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똑같은 햇빛 아래 놓여있는데도 혼자서만 어두침침하고, 여위고, 잔뜩 시든 모습이었다.


죽은 난초 부스러기


난초는 죽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물을 주고, 햇볕을 쬐게 해 주었는데도 영 힘을 내지 못했다. 난초의 마른 가지들은 죽음을 피해보려고 애쓰려는 듯이 간신히 위로 뻗어갔지만 죽은 곤충의 말라비틀어진 더듬이처럼 보일 뿐이었다.


그리고 며칠 뒤에 난초는 결국 바짝 말라죽었다. 나는 죽은 난초를 보며 이렇게 생각했다. 미안해, 난초야. 넌 너무 고상해서 나와 어울리지 않았어.


그런데 이상했다. 난초가 죽었다는 사실에 나는 어떤 위로를 받았다. 아니, 그것은 위로라기보다는 자유에 가까웠다. 나는 난초의 죽음으로 자유를 느꼈다. 더 이상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가지 않으리라는 강한 확신도 들었다. 마치 나를 향한 아버지의 기대가 난초와 같이 사라져 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것은 정말로 속이 시원한 기분이었다.


모든 생명체가 다 그렇듯이 난초도 언젠가는 죽을 운명이었다. 난초는 그저 한 아버지로부터 선택을 받았을 뿐이었고, 그의 딸이 난초와 함께 배달된 아버지의 사랑을 너무 무겁게 받아들였을 뿐이었으며, 그래서 좀 더 일찍 죽음을 맞이한 것일 뿐이었다. 예상보다 빠른 죽음이었으나 난초의 죽음은 나에게는 반갑고 또 즐거운 일이었다.


죽음으로써 생명이 다시 태어날 수 있듯이, 난초의 죽음으로써 나는 온전하게 아버지의 기대와 결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


난초의 죽음이 너무나도 무색하게 우리 집의 다른 식물들은 점점 더 크게 활개를 치고 있다. 남은 식물들은 전부 나를 닮아서 제각각의 모양에 아주 제멋대로다. 나무는 45도 대각선을 따라 이제는 아예 옆을 향해 자라나고 있다. 다들 예쁘게만 키우는 몬테스라는 사방팔방으로 잎을 뻗어내서 이제는 거의 우주선처럼 보일 지경이다. 그야말로 야생의 한복판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식물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생각. 정신없이 사느라고 4주 이상 물 한 모금 주지 못 했는데도 우리 집 식물들은 새 잎을 마구 돋아낸다. 마지막 남은 양분까지 짜내서 새 생명을 피운 후 죽으려는 것일까?


그에 비해 우리 인간은 죽을까 봐 늘 두려워한다. 그래서 매년 건강검진을 받는다. 가위에 눌린다. 죽는 꿈도 꾼다. 생각해 보자. 식물들이 우리처럼 죽는 꿈을 꿀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혹시 식물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부활도 가능한 것이 아닐까?


이미 죽어버린 난초에게 물을 좀 줘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죽어버린 난초가 혹시 다시 살아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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