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보다 공존'의 법칙
나는 어릴 때부터 지나치게 공감을 잘하는 편이었다. 친구가 나를 붙잡고 눈물을 흘리면 그의 모든 슬픔이 나에게로 흘러 들어오는 것 같았다. 엄마와 아빠가 언성을 높이며 싸울 때면 두 분의 모든 분노와 짜증이 다 나를 향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데 나는 공감을 잘함과 동시에 눈치도 잘 살폈다.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는 성향은 타고난 것도 있었지만, 후천적으로 더 발달한 것도 있었다. 나는 부모님으로부터 늘 인정을 받고자 노력했는데, 인정 욕구가 채워지지 않아서 부모님의 눈치를 많이 살폈다. 엄마아빠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한눈에 파악했고, 엄마아빠가 원하는대로 행동해서 좋은 딸로 인정받으려고 했다.
눈치를 살피는 이런 성격 덕분에 나는 중학생 이후로부터는 어떤 그룹이나 조직에서도 잘 지낼 수 있었다. 보이지 않는 더듬이를 뻗는 것처럼 나의 촉각을 곤두세워서 상대방의 기분이나 의중을 살폈다. 이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지 아닌지, 나에게 마음을 열었는지 아닌지도 잘 알아차렸다. 회사를 다닐 때에는 상대방이 A안을 좋아하는지 B안을 좋아하는지 어렴풋이 알 수도 있었다. 그건 정말로 나에게 큰 도움이 되는 기술이었다.
하지만 너무나 큰 맹점이 하나 있었다. 나는 누구나 나를 좋아하게 만들 수는 있었지만, 수많은 상대방에게 나를 맞추느라 나 자신을 잃어버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동안 내가 남들에게 공감했던 것은 바람직한 공감이라기보다는, 사실상 정서적인 전염에 가까운 것이었다. 나는 상대방의 슬픔과 분노, 불만이나 짜증, 기쁨이나 놀라움 같은 감정에 100%, 아니 120% 더 많이 공감하고는 했다. 물론 공감의 사전적 의미 자체는 '남의 감정, 의견, 주장 따위에 대해 자기도 그렇다고 느낌. 또는 그렇게 느끼는 기분'이기 때문에 내가 했던 것들은 공감에 속한다고 볼 수는 있다. 그러나 공감이 너무 지나치면 감염되는 것과 같은 상태가 되어버린다.
일반적으로 감정, 즉 정서는 감염된다. 상대방이 내 앞에서 온갖 불만을 쏟아내고 있다면, 자연스럽게 나의 정서도 부정적인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 <공감하는 유전자>라는 책에서는 69만 명의 페이스북 사용자를 대상으로 한 실험을 소개하고 있다. 이 실험에서는 긍정적인 감정과 부정적인 감정이 담긴 뉴스와 광고를 일정 비율로 통제하여 사용자에게 노출시켰다. 그 결과, 긍정적 소식을 많이 접한 유저는 긍정적 포스트를, 부정적 소식을 많이 접한 유저는 부정적 포스트를 많이 생산해 냈다. 의도적으로 노출된 특정 정서에 사용자들이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타인의 정서에 반응하게 된다. 내 주변 사람들이 긍정적이면 나의 삶도 긍정적으로 흐른다. 반대로 부정적이거나 남을 탓하고 불만을 표현하는 사람들이라면 나도 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특히 눈치를 살피는 사람이거나, 공감력이 뛰어난 사람이라면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 훨씬 더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
나는 너희가 적당한 수준에서 타인에게 공감하기를 바란다. 100%가 넘어가는 지나친 공감은 오히려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또한 타인보다 너희를 먼저 잘 세워야 한다. 스스로에 대해 깊이 고찰하고 난 후에야 타인의 마음도 헤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너희 스스로를 먼저 사랑한 후에 타인을 사랑할 수 있게 되고, 그렇게 함께 살아갈 수 있게 된다.
그런데 공감보다 중요한 것이 공존이라고 나는 또한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과 나의 다름을 인정하고, 그들이 사는 방식을 이해하는 것. 그래서 각자가 가진 다른 모양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함께 살아나가는 것. 이것이 바로 공존이다.
모두가 함께 공존하는 세상이 되었으면 한다. 다른 사람의 모습을 바꾸려고 하지 말고, 나와 상대방의 접점을 찾아서 서로가 모두 만족하고 함께 행복해했으면 좋겠다. 또한 스스로를 사회의 일부로 인식하여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방식을 찾고, 다른 사람들의 삶을 나의 삶과 동일하게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는 사고방식을 갖춰야 한다. 하나 재밌는 점은 다른 사람들에게 선한 일을 행할 때에는 우리 몸이 반응한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몸은 타인에게 선함을 베풀 때 더 건강해진다. 그러니 베푸는 삶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결국 나 자신을 위한 삶의 방식이다.
다른 사람에게 선한 일을 행하는 인류 고유의 인간성은 우리 몸을 만성 염증으로부터 보호해주는 유전자 패턴을 활성화시키며 건강을 유지하도록 돕는다.
- <공감하는 유전자>, 요아힘 바우어
공감이 겉으로 하는 것이고 일시적인 것이라면, 공존은 안에서부터 시작되고 지속적인 것이다. 단순한 사건이나 일시적인 감정에 공감하기보다는 수많은 다른 사람들의 모습과 감정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자발적으로 의미 지향적인 삶을 살아나가가는 것. 이것이 제대로 공존하는 삶이라고 생각해 본다.
우리 가족 넷만 생각해 봐도, 얼마나 각양각색인지 모른다. 우선 엄마와 아빠가 극과 극처럼 반대의 기질을 지닌 사람들이라 그렇고, 우리를 닮은 너희 둘도 극과 극처럼 안 맞을 때가 있다. 자주 싸우게 될 때에 나는 너희에게 '배려'와 ‘공존’에 대해 얘기한다. 너희들이 명령이나 강요에 의해 수동적인 자세로 공존하려고 하기보다는, 스스로 진정으로 원해서 의미 지향적인 삶을 살기 위해 공존하려고 노력하길 바라면서.
진정으로 너희가 행복한 삶을 살기를 바란다. 지나친 공감보다는 적당한 공감을, 수동적인 공존보다는 자발적인 공존을 통해서 말이다. 우선, 극과 극의 성격인 너희 둘부터가 서로의 다른 점을 인정하고, 배려하여, 늘 함께 공존하는 시간을 보낼 수 있어야 한다.
오늘 이것이 엄마가 너희에게 얘기해주고 싶은 또 다른 인간관계의 법칙, ‘공존’의 법칙이다. 사람들과 공존하고, 세상과 공존하고, 또 너희 자신과도 잘 공존하면서 살아나가기를 진심으로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