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우리 집은 어디에] 이사의 이유

이사의 이유

by 스테이시

이사라는 단어가 당신에게 주는 첫인상은 어떠한가? 나는 어렸을 때 이사는 수동적으로만 일어나는 일이라고 오해했었다. 집주인이 전세 보증금을 올리면서 재계약을 원하면 거의 떠밀려서 이사를 가야 하는 게 우리 가족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집에 끌려 다니는 느낌 자체는 싫었던 걸로 기억난다.

내가 결혼하고 첫 전셋집을 구하고 그 집을 재계약하기 위해 돈을 올려줘야 한다는 것을 실감하기 전까지는 나도 그랬다. 그때 정신이 파박 하고 드는 것 같았다. 이렇게 수동적 이사를 막기 위해서는 돈을 모아야 하는데, 내가 아무리 벌어도 절대로 이 끌려가는 패러다임을 바꾸지 못할 것이라는 슬픈 확신이 들었다. 현실은 당장 바뀌지 않아도 태도를 바꿔 보기로 했다. 어디에 사는지는 내가 수중에 가진 돈에 의해 혹은 집주인에 의해 혹은 사회적 분위기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내가 결정한다 라는 마음으로 말이다.

모든 것이 그렇지만, 위에서 학생부장 선생님과의 한판도 그랬지만, 나는 약자라서 가난해서 피해를 입는 것이 억울하다는 식의 자기 연민에만 빠져 있으면 계속 남만 원망하게 된다. 내 사랑하는 가족의 미소를 보기 위해, 주거를 해결하려고 두 팔 걷어 붙였으면, 사회나 부모님 혹은 제도를 만드는 정치인 그 누구라도 원망하는 말이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지금쯤이면 깨달 았으리라 생각한다.


그렇게 이사의 이유에는 보증금 인상에 따른 떠밀린 이사가 아닌 것이 훨씬 많다. 가족 구성원이 늘거나 줄어서 이사가 필요할 때가 있고, 보증금을 빼서 다른 곳에 투자하기 위해 이사를 하는 경우도 있다. 말 그대로 더 좋은 환경으로 가기 위한 이사도 있고, 다음 이사 갈 집에 시간 차 때문에 하는 이사도 있다. 솔직히 누가 이사 간다고 하면, 전세금 때문에 동네를 떠나는 건가 라는 생각에 혼자 안타까워하기도 하고 그랬는데, 이사는 기쁨과 슬픔, 현재 만족과 미래 준비 등 정말 말로 정의 내리기 힘든 많은 것들을 포함하는 의미 있는 결정이라는 대서 이사를 하는 모든 집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새집을 분양받아 이사 가는 집뿐만 아니라, 나는 이사를 하고 있는 트럭들을 보면, 그 각 가정들에 남모르는 응원을 보낸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이다. 이번 이사는 단지 이번을 위한 선택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모든 이사러들이 아셨으면 좋겠다.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 아마 이사의 이유를 객관식으로 조사를 해보면, 자녀들의 학교를 위해서가 가장 높은 비율로 나오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우리 아빠가 그렇게 마음에 들어하셨던 산본 집과 헤어지게 된 계기 또한 그러했다.


나는 고3 때, 수학 19점이라는 역사적인 기록으로 인해 발생한 우여곡절 끝에, 2학기 수시 때 13개의 대학을 떨어졌다. 수능 253점인 나는 단 한 개의 대학에서만 합격을 받았는데, 감사히 내가 쓴 원서 중에 가장 높은 학교였다. 홍익대학교 서울캠퍼스 경영학부. 동기와 선배 들은 “네가 홍대 서울 문 닫고 들어왔다”며 놀리곤 했다. 그때 발표가 12월 4일 인가 그랬는데, 내 쌍둥이 동생이 정오에 인하대 공대 합격 연락을 먼저 받았다. 그 뒤 몇 시간 동안 자기는 대학생이고 난 고등학생이라고 어찌나 놀리던지…… 내가 수학 점수 인해 수능 최저등급을 못 맞춰서 거의 모든 수시에 떨어짐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그 날 오후 8시, 수능 최저등급이 전체가 아닌 과목별인 홍대 서울에서 수학을 제외해줘서 난 기적적으로 합격 연락을 받을 수 있었다. 몇 시간을 당한 설움을 “난 인 서울 했다”라고 동생에게 갚아주었다. 내가 인하대 수시를 쓰고 어떨 결에 수능을 앞둔 동생은 불안한 마음에 하향지원으로 인하대를 써서 붙어버렸다. 동생은 수능 350점이었다. 지금까지도 나랑, 대리접수 해준 엄마는 이건으로 욕을 먹고 있다.


인하대를 가게 돼서 산본에서 등교, 하교가 헬이 된 동생은 맨날 이사 이사 이사 노래를 불렀다. 지금은 전철이 더 생겨서 인하대까지 가는 여러 가지 루트가 있지만 그 당시에는 금정에서 1호선을 타고 구로까지 가서 인천행 1호선을 타고 다시 가서 주안역에서 버스를 타야만 갈 수 있었다. 그리고 아침 일찍 산본에서 출발하는 스쿨버스 한 대가 있었는데, 아침마다 그 버스까지 데려다 달라고 보채는 동생 덕에 아빠는 이제 애들 다 키운 줄 알았던 50대를 피곤하게 보내고 계셨다. 이런 상황과 남은 빚을 청산하고 싶은 아빠의 바람이 맞물리게 되어 우리 가족은 7년 만에 이사를 결정하게 되었다.


이번 이사의 위치는 동생이 정했다. 인천행 급행을 탈 수 있는 구로역이란다. 어차피 나도 홍대를 가려면 신도림에서 2호선을 타야 했으니 좋은 위치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아빠와 엄마는 의견 차이를 보였다. 산본 집을 팔고 구로에 더 적은 평수를 빚을 더 내서 사자는 엄마와 구로에 더 넓은 평수에 전세로 가자는 아빠의 의견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번에도 아빠가 이겼다. 흑흑흑. 이쯤 되면 우리 아빠는 부동산의 마이너스 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 아빠는 도원 명의 ‘나 하나 누울 공간 있으면 족하다’라는 시가 자신의 철학이라며, 우리가 판 산본 집이 곧 1억 넘게 올랐다는 소식을 들어도 큰 요동이 없는 것 같았다.


그 뒤, 산본뿐 아니라 전국 집값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뭐가 먼지 모르는 나도 부동산 게시물을 쳐다보고 다녔으니 말이다. 어느새 전세 2년이 지나고, 주인은 그때 생소하던 반전세를 도입해서 아빠는 월세를 내게 되었다. 한 웃긴 일화는 공무원은 1년에 한 번 재산 조회를 받는데, 전화가 왔단다. 정말 가진 게 그게 다냐고. 그때 아빠는 30년이 다 돼가는 공무원이셨고, 재산은 전세 보증금과 중고 아반떼였다. 2년이 또 지나, 더 폭등한 시세에 우리는 평수를 줄여 전세를 찾아야 했다. 산본에서 이사 올 때 1억 빚내면 살 수 있었던, 아파트를 이제 2억을 더 내야 살 수 있었다. 여전히 아빠는 빚에 부정적이셨고 아빠 나이 50대 중반에 또 전셋집으로 이사를 했다. 이사하던 날, 이삿짐센터 아저씨의 말이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다.

“집을 줄여 가시는데 부모님이 상당히 긍정적이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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