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우리 집은 어디에] 우물 안 개구리

우물 안 개구리

by 스테이시

내 세계의 중심은 산본이었기 때문에, 내가 가장 가고 싶은 대학교는 집에서 가까운 한양대 에리카 캠퍼스였다. 학창 시절은 세계관을 형성하는 시기여서 오히려 다양한 경험이 필요한 시기가 아닌가 라는 생각 든다. 돌아보니 말이다. 오히려 초등학교 때는 내가 최고야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어라는 자신감을 형성해야 되는 시기이니 잦은 환경변화보다는 익숙함이 도움이 되는 것 같은데, 학창 시절은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고 자신의 채찍질해 나가려면 나의 못하는 것에 집중하기보다는 다른 환경과 친구들에게 도전을 받는 편이 좋은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우리 부모님의 이사 전략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하하하. 난 말 그대로 우물 안의 개구리였다.


그러므로, 안정적이다. 정착하자. 이런 단어들을 신화적으로 좋게 볼 필요가 없다고 나는 감히 주장한다. 전쟁을 겪으신 윗 세대 분들께는 정착이라는 단어의 신화가 유효하지만,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는 기꺼이 변화 또한 내 인생의 흐름으로 받아들여 이용하려는 태도가 필요하지 않나 생각해본다.


산본으로 돌아가 보면, 그곳은 비평준화 지역이었다. 현재는 뺑뺑이로 고등학교를 가지만, 그때까지는 학력고사를 보고 붙어야만 고등학교를 가는 시절이었다. 사실 변명이라면 변명이고 사실이라면 사실이지만 나는 공부하는 법을 터득하지 못한 채 꾸역꾸역 중학교까지 다녔다. 기본적인 성실함은 있었으니 반 10등 정도는 했지만, 달달 외워서 본시험이었지, 공부할수록 뭔가 깨달아지고 이런 것은 아니었다. 그리하여 산본의 인문계 중에 가장 낮은 서열을 다투던 신생학교 수리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그 뒤로 김연아 선수가 수리고를 다녀서 수리고가 유명해졌다고 들었다. 1학년 때 전교 70등쯤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사실 내가 재능이 있다고 생각한 건, 춤을 추는 것이었다. 댄스동아리로 활동하면서 댄스대회에 나가고 경기도 의회상을 받기도 했다. 그 친구들과 기획사 오디션 투어 등을 다니고 했던 즐거웠던 그때, 어느 날이었다.


등교 시 정문에서 학생 부장 선생님이 나를 잡았다. 쌀쌀 해지고 있어서 교복 안에 카디건을 입고 있었다. 나를 학교를 대표해서 춤을 추는 문제아로 이미 낙인찍어 놓고 있었다. 나를 보고 딱 이렇게 말했다.


“사복 입고 온 거냐? 술집 여자야? 그렇니까 네가 공부를 못하지”


그때는 지금처럼 인권이 침해당하면 어디다 말해서 공론화시키고 그런 시대가 아니었다. 선생님이 말씀하시면 법이 되고, 매로 때리는 것도 흔한 시대였다. 그때 머리를 망치로 쾅쾅쾅 맞은 듯한 충격에 휩싸였다. 나는 피해의식을 갖기를 거부하고 울지도 않았다. 다만 다짐했다. 다음 시험 때 봅시다.


다음 기말고사에서 전교 10등을 찍었다. 그 이후 졸업 전까지 모든 시험에서 전교 1-2등만 했다. 그렇게 나름의 복수를 했다. 물론 뛰어난 학생들이 모여 있는 학교는 아니었지만, 전교 1등은 머리가 비상한 애들이나 하는 건 줄 알았는데, 아이큐가 간신히 세 자리인 내가 하는 걸 보니, 공부는 똑똑한 머리가 아니라 강력한 동기부여로 하는 것인가 보다. 그래서 어느 정도의 자신감을 회복하긴 했는데, 입시를 대해보니 만만치가 않았다.


나는 고3 때와 대학교 1학년 때 재수생 수시를 통해, 한양대 안산 광고학부를 4번 지원했으나 모두 떨어지고 말았다. 전교 1등을 했을 때도 서울로 대학 갈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진 적은 없었다. 전교 1-2등이므로 형식상으로 라도 내놓으라 하는 대학의 수시를 쓰긴 해야 했다. 1학기 성균관대 논술을 갔는데, 영어로 nuclear에 대해 쓰라고 나왔다. 거짓말이 아니고 nuclear가 무엇인지 몰라서 소설을 쓰고 머리가 백지가 되었고, 그다음 고려대 수시에서는 머리가 아니라 시험지를 백지로 냈던 기억이 난다. 고3 여름 방학, 엄마는 처음으로 작정하고 사교육을 시켜주겠다며, 강남구청으로 날 데려갔고, 수학 수업을 듣게 되었다. 같은 반에는 강남에서 학교를 다닌다는 친구들이 3명이었는데, 반에서 30등 한다는데, 인 서울 대학을 얘기하며, 그 정도는 갈 거라고 했다.


그러면서, “넌 전교 1등이면, 연대 정도는 가겠네?”라고 물었다.


그냥 쓴웃음만 지었다. 우리 선생님은 서울대를 졸업한 천재라는데 특이하신 분이긴 했다. 수능을 봤고, 내 수학 점수는 19점이었다. 17살 겨울, 공부의 방법을 어느 정도 터득했다고 생각했으나, 이미 뒤처진 수학은 사실상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학원이 발칵 뒤집혔고, 선생님은 자신이 지도해서 그 점수를 받은 학생이 처음이라며, 선생님을 그만둘까 회의감이 든다고 했다. 그리고는

“찍었지?” 물으셨다.

“아니요. 풀었는데요.”


이게 내가 겪은 첫 강남이었다. 애 네는 뭐가 다른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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