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우리 집은 어디에] 프로이사러!

프로이사러!

by 스테이시

나는 살아 보고 싶은 집을 상상하길 좋아했지만, 그때 집을 줄여서 우리 가족이 이사한 곳은 구로역에서 신도림역으로 1호선을 타고 지나가다 보면 정면에 보이는 그 동으로 이사를 했다. 같은 단지 내에서 이사였기 때문에 해가 떠있을 때 이사는 끝이 났다. 방에 누워있으니 덜커덩 덜커덩 전철 소리가 3분에 한 번은 들리고, 차 소리가 24시간 경쾌하게 크긴 했지만, 교통이 매우 편리 함으로 납득이 되었다. 34평 살 때는 계단식이었으나, 24평부터는 4집이 함께 있는 복도식이었다. 그나마 제일 마지막 집이라, 복도 쪽으로 창이 없는 것이 다행일 따름이었다.


내가 기억이 있을 때의 첫 시작이 과천 7단지였던 것뿐이지, 그 전에도 이사를 몇 번 다니셨다고 한다. 그러므로 내가 결혼하고 이 책을 쓰고 있는 시점까지 나의 이사 횟수는 15번에 육박하게 되니 정말 난 다양한 종류의 집에서 다양한 가구 구조 배치를 놓고 살아본 경험을 갖게 되었다. 이런 경험에서 나온 내 취미는 ‘가구 옮겨서 집 구조 바꾸기’ 혹은 집에 맞는 ‘가구 고르기’였다. 나는 어떤 구조의 집이던 버려지는 공간 없이 살려 낼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이삿짐센터 직원 못지않은 날렵한 솜씨로 혼자 거의 모든 가구를 옮긴다.


물론 피아노와 붙박이 조립장은 할 수 없지만 말이다. 사람들은 너 같이 툭 치면 탁 넘어지게 생긴 애가 어디서 힘이 나와 가구를 옮기냐고 많이들 묻지만, 지금 이 상태의 집에서 살기 싫어라는 마음을 계속 가지고 사는 것은 나에게 더 어려운 일이다. 나는 문제를 보면 지금 즉시 그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단계적으로 계획에서 보통 하루 이내에 착수한다. 물론 가구를 사거나 돈이 드는 일이라면 그 지출을 할 가치가 있는지를 고민하느라 시간이 더 들지만 내 몸으로 땀 흘려서 구조를 바꾸고 마치 새집에 온 것 같은 새로운 마음을 갖는 것은 지금이라도 당장 할 수 있는 일이다. 위에서 학생부장님과 한판을 다시 얘기하게 되는데, 강력한 동기부여가 있으면 사람은 무엇이든지 한다. 지금 당신이 미지근하다면, 가족의 다음 집에 대한 고민에 전세기간이 아직 남았으니 느긋히 정보나 한번 접해볼까 이런 식이라면 당신은 그 문제를 해체하려는 자세가 아닐 것이다. 구경꾼이지.


지금 누가 나를 소개하라면 아니 내가 가장 잘하는 일을 말하라면, 2가지를 말할 것이다.


임대주택제도 컨설팅과 집안 구조 바꾸기 컨설팅. 그냥 근사하게 보이려고 컨설팅이라고 영어를 쓴 것이지 말 그대로 나에게 의뢰를 해오는 지인들 혹은 물어 물어 소개받고 연결된 사람들까지 이 두 가지 안건에 대해 상담을 해준다. 물론 돈은 받지 않는다. 임대주택 제도 같은 경우에는 사실 상담해주러 갔다가 그들의 간절한 사연을 듣고 내가 밥을 사주고 오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그리고 구조 바꾸기 같은 경우는 많이들 조언을 구하지만, 생활습관을 바꾸지 않으면 원래대로 돌아오기 때문에 사실, 약간 보람이 없는 일이기도 하다. 나는 스웨덴 가구 공룡 이케아와 한샘에 입사지원서를 낸 적이 있었는데, 위의 지점을 나의 대표적인 특징으로 기술했다. 저 두 가지를 한 번에 표현할 수 있는 최적화된 단어가 있으니, 바로 프로이사러! 결론적으로 이케아는 그런 나를 인터뷰에 초대해서 일하게 됐고, 한샘은 귀하 같은 인재를 초대할 수 없어서 죄송하다나 뭐라나. 여하튼 그랬다.


나는 이런 특이한 장점들을 갖게 도와주신 우리 아빠에게 늘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다. 동생은 아빠가 재테크에 관심이 있었다면 지금 우리가 어땠을 거라고 여전히 시를 읊지만, 나는 아빠가 자신의 신념으로 꿋꿋이 살아오신 것에 존경을 보낸다. 나에게 넉넉함을 주시진 않았지만, 돈으로 살 수 없는 장점과 근성을 주셨으니 말이다. 우리 아빠는 베이비붐 세대이시고, 기회만 잘 타셨으면(?) 남부럽지 않을 자산을 소유하셨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유가 무엇이었든 간에, 아빠는 실 거주 집 하나 남은 은퇴자가 되셨다. 나는 그것으로도 참 감사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엄마의 입장이라는 것도 있으니 한 번 들어보자.


첫 집을 살 기회는 리버 사이드 호텔 옆 아파트였다고 한다. 그때 2000만 원이라고 그랬었나, 대출을 당기면 당겨지는 그런 시기였나 보다. 어쨌든 아빠는 그때도 반대를 했다고 한다. 그다음은 과천 7단지를 사서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으면, 부자가 되었을 것이라는 가설이다. 얼마 전 그 위치에 재건축하는 아파트가 10억에 분양되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세 번 째는 방이동 코오롱 아파트도 지금 10억에 근접한다라나 뭐라나. 그다음은 산본이 아닌 엄마 말대로 분당에 갔으면 투자금 대비 많은 수익이 났을 것이라는 가설이다.. 아니면 평촌이라도 갔으면 나와 내 동생이 더 대학을 잘 갔을 것이라는 (?) 소설이 있다. 또 산본을 팔고 서울에 왔던 2000년대 초. 그때 전세가 아니라 집을 샀어야 된다는 조금 늦은 후회랄까. 내가 다 알지 못하지만 날려버린 내 집 마련 기회는 엄마에게 실로 많을 것이다. 그리하여 더 이상의 후회를 하지 않기 위해, 엄마가 드디어 한 번 이기게 되었다. 아빠의 공직생활 30년 모든 퇴직금으로 같은 단지 내 24평 아파를 구매하시기로 결정하셨다.


그게 내 결혼 전 마지막 이사였다.


난 이런 아빠를 보면서, 아 원래 인생 이란 것이 일평생 노력해서 느지막이 집 하나 얻게 되는구나라고 생각했고, 젊을 때 집을 갖는다는 상상해본 적조차 없었다. 나는 우리 아빠가 부자는 아니지만 열심히 살아오신 것으로도 그냥 자랑스러웠다. 젊을 때 갖게 된 첫 집을 그렇게 보증으로 날리고, 그 빚을 또 갚고, 할머니 할아버지 노후까지 계속 돌보시다가 이제야 은퇴를 맞이하며 산 집에 대해 아빠도 뿌듯하셨으리라고 생각한다. 그 이사 날, 나는 출근을 했고 야근 후 새벽 4시에 퇴근을 해서 공동 현관 앞에서 쩔쩔매다 간신히 집에 들어갔다. 저번 전셋집과 동일한 구조였고, 다른 점이 있다면, 작은 방 2개가 확장되어 이었다.


이사는 여름이었고, 겨울에 큰 깨달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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