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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이시 Dec 27. 2019

겨울방학 70일, 그 첫 시작 주

믿을 수 없었다. 70 일 이게 실화인가. 딸내미의 첫겨울방학 이야기이다. 워킹맘에게 너무 가혹한 일이었으나 이 또한 지나가리라. 사실 입학식 때부터 예고된 일이었으나 마땅히 대책을 마련하진 못했다. 12월이 돼서야 돌아보니 다들 유명 어학원이나 대학교 영어캠프 학원 보강 등을 빼곡히 짜 놓았더라. 그제야 그 대학에 전화해보았으나 대기조차 받지 못할 정도란다. 어허, 다른 친구들처럼 방학을 보내는 건 물 건너 간 줄 아는지 모르는지 날보고 해맑은 첫째이다.


사실 이 녀석은 영어강사인 엄마에게 빅 펀치를 날려준 소중한 딸내미이다. 5살 때 영어 거부를 보이더니 기어이 8살까지 기다렸다가  보낸 학원에서도 숨이 막힌다며 뛰쳐나온 이력이 있는 친구다. 즉, 영어캠프니 뭐니 알아보았던 건 내 생각이었던 거지 이 녀석이 가겠다 할리가

없다. 그나마 수학학원에 가주는 게 진짜 기특할 따름이다. 그래도 수학은 한국말로 쓰여 있으니 재미있다고 한다. 수포자인 나는 공감할 수 없으나 내 딸내미라는 녀석은 그렇다. 수학 특강이라도 할까 하여 전화를 했다.


"어머니 방금 마감돼서 대기 1번이세요. 그런데 거의 안 빠진답니다."


이쯤 되면 운명이다. 방학 때 녀석은 이로서 수많은 자유시간을 확보했다. 아, 녀석과의 눈치싸움에서 내가 진 것 같은 이 느낌은 뭘까. 그리하여 돌봄 교실도 개설될지 불투명한 상태에서 나와 그 녀석의 딜은 이러했다. 엄마가 출근할 때 8시 45분에 집 3분 거리에 있는 구립도서관 로비에 데려다준다. 9시가 되면 2층 어린이 도서실로 올라간다. 할머니가 데리러 올 때까지 책을 본다. 책을 본다. 또 책을 본다. 70일간 500권을 읽으면 십만 원을 상금으로 걸기로 했다.


생각해보니, 대한민국 초등 1학년 중에 녀석이 제일 난이도 높은 겨울방학 미션을 수행하게 된 것 같다. 아마 다른 학부모들이 아시면 애를 방치한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합리화와 변명을 하자면 녀석의 꿈은 동화작가이다. 집에 있는 책들이 종이가 낱장으로 분리될 때까지 봐서 절대 되팔지  못하게 만들어 놓는다. 가끔 마음 드는 건 화장실까지 들고 가서 물까지 적셔놓으니 중고책 테크는 진작 포기했다.


무뚝뚝한 녀석이 환한 미소를 보여줄 때가 있는데 새 책 박스가 배달 올 때이다. 책을 와구와구 해치우는 녀석에게 가장 큰 협박은 '너 책 못 보게 못 보게 한다'이다. 그 녀석이 영어학원에 가기 싫었던 이유도 나중에 듣고 보니 학원에 가면 책 읽을 시간이 줄어든다는 거였다. 아, 이 친구를 혼낼 수도 없고 마냥 칭찬해 줄 수도 없다.


딸내미가  아기일 때 우리 가족은 큰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고 그때 받았던 광고 문자 중에 가장 가슴이 아팠던 건 책 전집 광고 문자였다. 그 상황에 책을 산다는 건 나에게 사치이자 감동이었다. 그 녀석도 그걸 아는지 책을 사랑하는 아이로 컸다. 지금은 내가 경제활동을 하는 덕분에 녀석이 요청하는 책을 사줄 수 있다는 건 큰 행복이다. 책 하나 사달라길래 그건 어렵지 않다고 하니 안어려우면 많이 사주면 안되냐고 묻는다. 책사는 건 어렵지 않아도 책이 많아져서 집을 넓혀야 되는건 어려우니 살짝 고민을 한다.


방학 그 시작, 나도 휴가를 받았고 우리는 집 옆 도서관보다

더 큰 강남구 어린이 도서관을 방문했다. 밥 안 먹어도 배부르다는 표정은 이럴 때 이 아이가 보여주는 것이다. 매일 이곳에 데려와주면 좋으련만 읽을 책이 없어져가는 집 옆 도서관도 감지덕지이다. 읽을 책 찾기가 힘들다는 말에 사심을 담아 한마디 했다. "영어공부를 해. 그럼 읽을 책이 많아져." 그랬더니 뿌슝이라며 내게 펀치를 날린다.


방학, 녀석은 동화작가라는 꿈에 한걸음 더 다가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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