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무언가를 두려워한다. 코로나라는 것이 처음 발생했을 때, 우습게도 나는 코로나 감염에 대한 두려움보다 혹시 코로나에 감염된다면 생계로 하고 있는 일을 잃을 것을 더 두려워했던 것 같다. 회사라고 불리는 곳에서는 코로나로 피치 못하게 입원을 하거나 자가격리 대상자가 된다면, 그 시간이 지나 대부분 돌아갈 수 있겠지만, 현재 내가 하는 일은 그런 면에서 회사라고 소개하기 어려운 면이 있는 것 같다. 자가격리 대상자가 되어서 2주를 결근한다면, 다시는 현 근무지로는 못 돌아올 것이다. 하지만 코로나와 공존해가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이 일자리를 잃어버리는 것이 두려움의 우선순위가 아니라는 것은 정리가 되었다.
지난해 겨울, 이유 없이 열이 나던 날 새벽 3시에 응급실에 갔다가 코로나 검사하기 전에는 못 들어온다며, 지금 코로나 검사를 할 경우 결과가 나올 때까지 1인실에 격리 입원이 들어가며 비용은 70만 원이라는 소리를 듣고 나니 말이다. 아침까지 주차된 차에서 혼자 부들부들 떨어가며 해열제를 먹고 열을 재는 일을 반복하다 9시에 검사를 받았던 그날을 지나며, 직장을 잃어도 되는 거지만 목숨은 당장 잃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는 것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살아있을 수 있는 날, 그것만으로도 감사한 날이라는 감격은 왜 또 이리 빨리 사라지는 것인지. 참, 이런 내가 나도 참 싫다. 사소한 것들로도 기뻐하는 어린아이 같은 마음은 잃어버린 걸까? 아니면 애초부터 없던 시니컬한 아이였을까?
그러므로 나는 여전히 무언가를 두려워한다.
많이 먹은 날, 다음 날 청바지가 잘 잠기지 않을까 봐 두려워하고, 우산을 가져오지 않은 날 다가오는 구름을 두려워하며, 누군가 카톡이 아닌 대면으로 나와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것조차도 두려움의 카테고리가 될 것 같다. 하지만 그중에 가장 두려운 것은 '내년에도 똑같은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라는 것이다. 비단 직업적인 이야기는 아닐지도 모르겠다.
나는 늘 뭐든 열심히 하고 있다. 지금까지 열심히 한 이유는 그것이 좋아서 라기보다는 그것이 싫어서 여서가 더 자주였다. 지금도 그렇다. 둘째가라면 서럽도록 만들어서라도 일을 하지만, 더 빠른 속도로 일을 섭렵해 나가고자 하는 것은 이 일이 루즈하게 느껴지고 지겨워서라도 내년에 이렇게 살지 않을 이유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는 내가 적당히, 나쁘지 않은 것에 안주하고 있을 가능성이 49대 51에서 50대 50으로 올라오는 것만으로 미칠 것 같다.
현재 나의 삶이 위법이 아니며, 나만 참으면 가족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일이니 막말로는 못할 것도 없다. 하지만 그렇게 몇 년을 견디었더니, 가슴이 고장 나 버린 것 같다. 더 이상 뛰지 않고 설렘보다 그리움만 가득하다. 그리움이라고 이름하는 것조차 너무나 미미한 작은 조각들이지만 말이다. 늘 가슴 뛰는 일을 하고 싶다고 말하지만, 1년 단위의 계약을 시작하는 순간부터는 1년을 어떻게 하지라며 답답해 미쳐버릴 것 같이 날뛰다가도 어느새 1년이 다되어가면, 도전은 무모해, 나쁘지 않았잖아라며 몇 년을 나를 속여왔다.
올해가 절반이 지난 시점에서 다시 한번, 나는 극도의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 나에게 최악은 지금 여기서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것이다 라는 나름의 신념을 하루에도 몇 번씩 되뇌어 본다. 삶은 나에게 굴복하라고 네가 뭐가 특별하다고 나의 무게를 이기려 드냐고 하지만, 내가 잘나서도 특별해서도 아니고 그냥 나도 살고 싶어서 그러는 것뿐이다.
이 단계를 클리어해야 벗어날 것 같아서, 벗어나고 싶은 것을 더 열심히 하는 이 아이러니는 그것조차 하지 않으면 더 비참해지는 것 같은 나이기 때문이다. 늘어가는 것 중에 타협과 협상의 기술은 야매 자격증을 딴 것 같은 기분, 어찌하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