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
나는 이런 선택의 문제들을 대화하거나 상담할 사람이 전혀 없었으니, 그게 양가 부모님께 3점 이는 비밀이었다. 경제적 상황이 이러한데, 임신을 했다면 축하받기 어려울 것 같았다. 그러므로 임대주택 당첨이 확실해질 때까지 비밀로 할 작정이었다. 참 임신했다는 것을 비밀로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 것 같다.
한 생명은 언제든 축하하고 축복받기에 마땅한 존재인데, 그 녀석을 숨겨야 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3점 이는 4-5개월이 돼서야 가족들에게 공개가 되었다.
그때 난 신도림에서 코엑스까지 전철을 타고 가서 알바를 했다. 일주일에 주 2회 시급 7500원 의류회사 사무 보조였다. 첫째를 시댁, 친정에 하루씩 부탁하고 지옥철 2호선을 타는데 몇 번 정신을 잃을 것 같았던 적도 있다. 밥 한 끼 시먹으면 내 시급이 넘는 코엑스에서 나는 회사에 비치된 식빵으로 끼니를 해결했고, 그래서일까 나중에 태어난 둘째는 아주 작고 약하고 실제 많이 입원도 했다.
둘째에게 미안한 마음도 있었지만, 일단 눈에 보이는 첫째를 굶길 수는 없으니 알바를 했다. 나름 열심히 대학 나오고, 공기업에서 일한 내 과거를 누가 아는 것도 부끄러워서 누가 물어봐도 크게 내 얘기를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나를 “아르바이트생”이라고 불렀다. 그러다 내가 결혼하고 임신한 것은 숨길 수 없었으니 그 뒤로는 “알바 언니”로 바뀌었다.
처음에는 복사기 앞에 서 있는데 눈물이 막 날 것 같았다. 아 내가 이렇게 살려고 그 노력을 하고 살았는가, 내 학비를 내주시고 빚내서 교환학생까지 보내신 아빠의 얼굴을 생각하면 죄송해서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자존심이라는 것을 잘근잘근 씹어서 밟아보니, 웬만한 건 견딜 수 있는 강심장으로 거듭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나는 이제 여러 가지 다 먹을 수 있는 우리 아기에게 먹을 것을 공급하는 기쁨이 더 컸으므로, 하루에도 열 번씩, 구겨지는 자존심 아니 낮아지는 자존감에 때려치우고 싶었지만, 견디고 또 견디었다.
돌아보면, 그 뒤로도 훨씬 더 큰 파도들을 맨몸으로 부딪혀 내야 했으니, 둘째 만삭이 될 때까지 의류 회사 해서 세무조사 보조한다고 서류 박스 나르고 한 경험은 스펙까지는 모르겠지만 나름의 자산이 된 것을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