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왕 2 지구 1단지 49형은 복도식이었지만, 오래된 아파트처럼 일자형 복도가 아닌 디귿자 모양에 가까웠고, 한 층에 7개 집이 함께 있었다. 그러므로 7개 중에 3 개집은 복도에 창이 있지 않고 모든 창이 밖을 향하고 있었다. 우리 집도 그러했고, 작은 방은 산 조망 권이었다.
지난 미성아파트에서 복도에 창이 있던 방은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왠지 복도에 사람이 지나가면서 두드려 볼 것 같고 그럼 약간 무서운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방은 냉장고님을 필두로 창고로 쓰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국민임대 49형을 기다리면서, 복도에 창이 없고 집 앞에 유모차 주차할 공간이 있길 기도했다. 그때 집은 13개 집인가가 일자 복도에 쭉 연결되어 있어서 사실 유모차를 접어서 현관으로 넣어 놓아야 했는데 참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접지 않고 현관에 밀어 넣어 놓는 것도 우리의 작은 집의 입구를 막는 것이어서 가끔 감옥 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다른 당첨자들은 이미 사전점검도 마친 후에 우리는 동 호수를 문자로 받았다. 동 호수를 11월 말에 알려준다던 SH공사 담당자는 계속 기일을 늦추고 있었다. 그래서 한 번은 내 동생한테 "SH 때문에 머리가 아프다"라고 문자를 보냈더니, 동생이 답장이 왔다. 부부싸움을 했냐고. 그도 그럴 것이 나의 남편 이니셜이 SH라서, 남편 이야기인 줄 알았단다. 모처럼 빵 터 저서 웃었다. 뭐 남편도 아직도 그 꿈을 이루겠다고 버팅기고 있었으니, 그렇게 중의적 해석을 해도 틀리지는 않은 것도 같았다.
그 동호수 문자를 금요일 밤에 보내주셔서 토요일에 집을 보겠다고 무작정 연지타운(천왕 2 지구) 1단지 관리소에 갔다. SH공사는 중요한 발표를 금요일이나 휴일 전에 하는 것을 참 좋아한다. 아마 결과 발표 후에 민원전화 혹은 문의 전화가 며칠 째 많이 몰려오는 것을 그렇게 즐기고 싶지는 않은 걸까 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온 가족이 출동하여 방문했는데, 관리소에서는 흔쾌히 협조해 주셔서 참 감사했다. 문을 열어주시는데, 시간이 조금 걸리는 통에, 우리 아가는 이사 갈 집을 보지 못하고 잠이 들어 버렸다.
햇살이 정말 우리 집을 향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밝은 곳이었다. 평면도를 봐서 이미 구조는 알고 있었지만, 현장에 가보니 5호 라인 현관 앞에만 1.5미터 정도의 전실 같은 느낌의 공간이 있어서 다른 집들 복도 통행에 전혀 지장을 주지 않게 유모차를 세울 수 있었다. 눈물이 날 뻔했다.
새 집에 처음 살아보게 될 내가 가장 설레었던 부분은 바로 지하주차장이었다.
와 ~ 엘리베이터가 주차장 하고 연결되어 있어 ~ 우와 우와
현관부터 집을 찬찬히 음미하며 둘러보고 가족들은 축하를 해줬다.
그 집에 이사를 가는 것은 사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우리 3점 이가 큰 역할을 해준 것이고, 우리 가족 부모님, 모두 3점 이가 복덩이라며 참 많은 축복을 해주셨다. 온 가족의 골칫덩이로 여겨질까 봐 둘째 임신 초기에 말하지 못하고 숨겨야 했던 슬픔이 모두 사라진 날이었다.
그렇게 집을 보고 이제 이사를 본격적으로 준비해야 했다. 12월 말부터 입주가 가능했지만, 우리가 동 호수를 받은 때는 이미 중순이었다. 3점 이가 2월 예정이었기 때문에 최대한 그전에 이사를 하고 싶었다.
우리 집주인 할머니는 우리 다음 세입자는 월세로 받겠다고 하셨다. 월세라서 잘 안 나갈 수도 있다고 부동산에서 겁을 주셨다. 아직 우리 계약 기간이 1년 남았기 때문에 혹시 집이 입주 지정기간까지 안 빠지면 어떡하나 하고 엄청나게 예민해졌다. 당첨만 받으면 세상 걱정 끝날 줄 알았더니, 기존 집을 빼는 것도 큰 과제였다.
실제로, 기존 집을 빼지 못해 국민임대, 장기전세, 행복주택 등에 입주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케이스들도 있다. 계약 이후 이런 사유로 취소를 하면 입주를 안 해도 감점 사실이 생기기 때문에 참 어려운 문제이다. 그렇지만 서울시 전월세 지원센터에서 이사시기 불 이치에 대한 대출건을 다루고 있으니 포기하기 전에 꼭 시도해 보아야 할 루트이다.
12월부터 1월 초 까지 10팀도 넘게 집을 보러 온 것 같았다. 그때마다 아기 짐으로 미어터지는 그 집을 깨끗하게(?) 정리해놓는 것도 보통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 우리 집을 마음에 든다고 하셨지만, 이사시기는 2월 말이나 3월 초를 말씀하셨다.
1월에 1월 입주 물건을 찾는 것은 흔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아주 어려 보이는 신혼부부가 급하게 결혼한다면서 우리 집을 보러 왔다. 월세여도 좋다며, 셋째 주 토요일에 들어오겠다도 하였다. 휴, 한숨 돌렸다.
그러나, 또 다른 산이 있었으니, SH공사와 하는 금융거래가 토요일에 하는 것은 복잡하다는 것이었다. 그때 아마, 수표로 관리소에 출장나 와 있는 은행 직원에게 지불을 하고, 입주일 처리는 월요일로 되었던 걸로 기억하고 있다. 이사라는 것이 들어오는 사람과도 관련된 거라서 맘대로 날짜를 정하지 못하는 것이라는 스트레스받은 사실을 그제야 경험을 한 것이다.
그다음부터는 SH에서 SH물건으로만 이사를 했으니, 나는 늘 평일에 비어있는 집으로 이사를 하는 소소한 기쁨을 만끽할 수 있었다. 남편은 무언가를 오래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아닌데, 그 이사날짜는 지금도 기억하는 걸 보니 인생에 큰 무언가 이긴 했나 보다.
만삭의 몸을 이끌고 나는 이사현장을 지켰다. 감사히 겨울 치고는 포근한 날씨였다. 이사를 하고 하룻밤은 남편과 둘이 집 정리를 하고 할머니 집에 맡겨두었던 첫째를 집에 데려왔다. 집에 가자 하면서 처음 보는 주차장에 내리니 아이는 이게 뭐지 라는 동그란 눈이었다.
남편이 아이를 안고 들어와서 거실에 내려놓았다. 이사를 갈 거야 더 넓고 깨끗한 집일 거야 라고 21개월한테 애기는 계속 해왔었지만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 리가 없었다. 그런데 그 날, 첫째는 바닥에 깔린 자신의 뽀로로 매트를 보고 순간에 깨 달았다.
이제 여기가 우리 집이라는 사실을.
평소에 조용하고 담담하고 큰 리액션이 없는 아이였는데, 방방 뛰면서 그 집을 빙글빙글 도는데, 남편과 나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렇게 좋은가. 우리 꼬맹이. 엄마도 너만큼 좋아.
다섯 걸음밖에 못 걷던 그 아이가 마음껏 뛰어 다 닐 수 있던 그 집, 우리에게는 마치 작은 천국 같았다.
남편은 내가 3점 이를 낳을 때가 임박하여, 알바를 못하게 되자 자신이 쫓던 꿈을 내려놓고 이제 어쩔 수 없이 다시 직장인이 되어야 했다. 남편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우리 때문에 살 수 없다는 것에 큰 좌절을 했다. 버티고 버티면 언젠가 내가 이해할 줄 알았나 본데, 내가 보기엔 그냥 철부지 같아 보일 뿐이었다.
남편은 자신의 상황에 몰입되어 자신이 많은 것 혹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했겠지만, 정작 모든 것을 버리고 억척 아줌마로 거듭나야 했던 것 나였다. 모성이란 참 그렇다. 해맑은 눈으로 밥을 주는 나만 바라보고 있는 이 아이를 실망시킬 수는 없다는 게, 참 간절한 것이다.
나는 두 아이를 생각하며, 남편을 직장으로 몰아냈다.
내 생각에는, 내가 굽히고 꺾은 내 자존심에 비하면 그가 버려야 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 였다. 형편이 나아진다면, 직장과 병행할 수도 있는 꿈이라고 나는 판단했다. 꿈은 내려놓으라는 것보다는 보류하라는 권면이었지만, 그가 느낀 좌절의 깊이에 대해서는 이해한다.
그래서 나의 알바를 멈추게 만든 이 3점이, 그 3점 이로 말미암아 살게 된 새 집에도 시큰둥했던 사람인데, 자기를 꼭 빼 닮은 그렇게 애틋한 첫째가 저리 뱅글뱅글 돌며 연어처럼 팔딱팔딱 좋아하는 것을 보니 마음이 좀 잡히는 듯해 보였다.
우리를 이 집에 살게 해 준 3점 이가 이 사 후 3주 만에 태어났다. 우리 4인 가족 난 그렇게 거기 30년을 살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웃음)
그런데, 첫째와 둘째의 성별이 다르다 보니, 방이 세 개 여야 될 텐데...
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사람 욕심이란 게 말을 사면, 안장을 놓고 싶다더니, 딱 그 꼴이었다. 어렵게 얻은 것에 만족하지 못하는 내가 꼴불견 같았지만, 나는 다시 SH홈페이지를 들락날락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