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밤, 갑작스런 야근을 하게 됐다. 시간이 늦어질수록 느려지는 머리 회전에 고통스럽다. 몸도 배배 꼬인다.
'얼마나 걸릴 것 같아?'
'한.. 30분?'
걱정이 돼서 전화가 온 남편에게 예상 시간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두 배를 곱하면 얼추 맞다. 그럼 미리 두 배를 곱하면 되지 않나 싶지만 그랬다가는 혹시나 네 배의 시간이 걸릴까 봐 기준 시간은 바꾸지 않기로 한다.
마지막 문서 작업을 하면서 쓸쓸한 분위기가 싫어 라디오를 켰다. <푸른밤, 옥상달빛입니다>에서 '자기 자신에게 돈 쓰는 게 어렵다'는 사연이 소개되고 있었다. 이어서 가수 하림의 추천곡이 흘러나왔다.
♩ 이소라 - 나를 사랑하지 않는 그대에게
밤 11시를 10분 남긴 시각, 부랴부랴 롱패딩을 걸쳐 입고 사무실 불을 껐다. 어두운 계단을 내려와 퇴근 지문을 찍고 경비 아저씨께 인사를 한 뒤 귀에 이어폰을 꽂고 노래를 검색하며 정문을 나선다.
낮에도 기온이 영상과 영하를 왔다 갔다 하면서 햇빛과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눈이 내렸다. 지금도 나뭇가지 위에 얕게 쌓인 눈이 바람에 휘리릭 흩날린다. 나도 모르게 몸을 바르르 떨며 패딩에 달린 모자를 쓰고 살짝 끈을 동여맸다.
바로 앞 횡단보도에 버스 한 대가 바뀌는 신호등을 보고 천천히 속도를 줄인다. 가로등으로는 조금 부족한 길 위로 전조등 불빛이 비춘다. 종종걸음으로 아파트 단지의 담벼락을 지나 첫 번째 작은 횡단보도에 선다. 상가를 중심으로 양쪽에 작은 횡단보도가 두 군데 있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도 갑자기 우회전해서 들어오는 차를 맞닥뜨릴 수 있어 이어폰을 잠시 빼고 시각과 청각을 곤두 세운다.
횡단보도에 불이 초록색으로 바뀌고 차가 없는 것을 확인한 후 천천히 길을 건넌다. 매일 11시쯤 문을 닫는 빵집에서도 따뜻한 불빛이 인도 위로 비춘다. 그 순간 살짝 시야가 흐려지며 눈발이 쏟아진다. 눈앞에 화면이 하얗게 번지는 걸 보면서 모자를 벗었다. 머리가 살짝 젖고 바람이 시원하게 지나간다. 펼친 손바닥 위로 눈송이가 살포시 내려앉는다. 귓가를 때리는 바람 소리를 배경으로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나를 사랑하지 않는 그대에게.
언제 들어도 마냥 슬펐고 감당할 수 없는 감정으로 가득 찬 노래라고 생각했는데 처음으로 '극복'을 경험했다. 슬픔보다 차가운 공기와 바람을 따라 일정하게 떨어지는 눈송이가 무겁게 내려앉은 어깨를 차분하게 감싸 안아주는 것 같았다. 가사를 음미하며 세상을 커튼처럼 덮어버리는 눈 저 너머의 하늘에 반짝이는 별을 떠올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