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이유 없는 다정함

김연수 <젖지 않고 물에 들어가는 법>

by 이용수

#1

중앙일보에 김훈 작가의 특별기고가 1면에 올라와있다. 악성 민원에 시달리다 자살한 초등학교 교사를 추모하기 위해 모인 '전국교사일동'의 현장에 몸을 담그고 쓴 글이었다. '악성 민원'을 '내 새끼 지상주의'로 이름 붙이고 뿌리 깊은 유전의 폐해를 고발한다. 악성 민원이 부유층 밀집지역에서 더 잦고 사납다는 일선 교사들의 고백을 빌려 부(富)의 천민성을 까발리는 대목에서는 억누르지 못한 분노가 읽힌다.


#2

서현역 부근에서 발생한 묻지 마 칼부림의 당사자는 특목고를 못 가 들어간 일반고를 시시하다며 자퇴했었다. 열여섯, 열일곱의 아이가 특목고를 '높은 곳'이라고 굳게 믿게 한 범인은 누군가. 아마도 사회적 가스라이팅이 그 성장의 트랙이 아닌 오징어 게임의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세으리라.


#3

신림역 사건, 서현역 사건을 모방하는 '살인 예고'를 소셜미디어에 공개하는 이들은 극단의 관종이거나 반사회적 아웃라이어이거나 아니라면 숨어있는 비극의 표지일 것이다. '가난은 유니폼 속에 가려져있을 뿐'이라는 주장이 떠올라서다. 물질적 가난과 정신적 가난이 뒤엉킨 깊은 어둠 속에 그들이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신문에 등장하는 사건들의 바닥에는 겉으로 평온한 일상 속에서 자행되는 오랜 집단적 폭력들이 놓여있다.


#4

김연수 작가의 <젖지 않고 물어 들어가는 법>에는 다음의 대목이 나온다.

'그때그때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생각들을 믿지 않고 이야기의 뼈대를 보게 되면 젖지 않고도 이야기 속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이군요.'

'소설가는 몰라도 되는 세계를 인식함으로써 그 세계를 가능하게 합니다. (중략) 타인에게 이유 없이 다정할 때 존재하지 않았던 것들이 새로 만들어지면서 지금까지의 삶의 플롯이 바뀝니다.'


#5

김훈 작가는 몰라도 되는 세계에 이유 없이 다정하다. 글은 그래야 하는 것이라고 김연수 작가가 대신 나에게 알려주었다. 책을 잠시 덮다가 띠지에 '오직 이유 없는 다정함만으로'라고 적혀있어 다시 들킨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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