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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드 Mar 08. 2019

삶은 연결되어 있다

불편함과 충만함이 주는 위로

 올 초, 오빠의 원래 없던 말 수 가 부쩍 줄었다. 얼굴빛도 어두웠다. 그리 좋아하지도 않는 술을 마시는 날도 잦아졌다. 엄마도 내게 와서 오빠가 무슨 일이 있는 것 같다며 걱정을 하신다. 나는 그냥 ‘오빠도 사는 게 힘들겠지.’ 하고 말았지만 좀처럼 힘든 티를 내지 않는 오빠의 변화가 내내 마음에 걸렸다. 그러다 오빠 카톡의 프로필의 글귀가 눈에 띄었다. ‘... 이 또한 지나가리라. 주어진 내 삶의 시간 속에 주의 뜻 알게 하소서’         

  

 힘든 일이 있다는 추측이 확실해졌다. 결국 오빠는 메니에르병에 걸렸고, 쉬지도 못하고 밥벌이를 위해 출장을 다녀와야 했다. 그래도 나는 무엇 때문에 힘든 거냐고 묻지 못했다. 묻는다고 답할 스타일도 아니지만 정확히 몰라도 알 것 같기도 했다. 회사일일 수도 있고, 돈 문제 일수도 있고, 집 문제일 수도 있고, 삶에 대한 회의 일수도, 여러 문제가 복합적일 수도 있다. 슬럼프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오지 않는다. 사방에 겹겹이 포위된 것처럼 주어진 삶이 못 견디게 버거워지는 날은 누구에게도 있기 마련이니까. 그럴 때는 그냥 아무것도 묻지 않는 편이 나은 것 같았다. 아니, 솔직히 다 나 때문인 것 같아서 묻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2001년 두 번 수술했던 턱관절 질환이 재발했을 무렵 부모님은 이혼을 하셨고, 나와 엄마와 오빠는 서울에서 분당의 작은 아파트로 급히 이사를 했다. 이후 내 건강은 계속 악화되었고 다시 큰 수술이 필요한 상황이 되었다.         


 가족 중 한 사람이 몸이 아프다는 것은 가족이 가진 자원을 모두 쏟아부어야 하는 일이다. 그 당시 우리 가족도 그랬다.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모든 자원을 내 치료에 쏟아부었다. 증상이 계속 나빠지면서 여러 병원을 전전하다가 미국에 수술을 받으러 가기로 결정했다. 넉넉하지 않은 상황에 미국에 수술을 받으러 가면서 집 담보로 대출을 받고, 엄마의 보험금까지 다 털어서 미국에 가서 2004년에 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회복되던 중 전신 근육에 경련이 일어나면서 다시 병과 기약 없는 싸움이 계속되었다. 수술 전 기대처럼 사회로 돌아가서 경제활동을 할 수 없었다. 입사한 지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오빠는 그렇게 가장이 되었다. 나 혼자 다니던 교회를 엄마와 오빠가 다니게 된 건 그 무렵이었다. 삶의 무게가 무거워서 어디에라도 의지하고 싶었던 것일까 짐작만 할 뿐이다.           


 오빠의 어깨에는 오랜 시간 무거운 책임감의 무게가 얹혀있다. 가족을 돌보느라 결혼도 하지 않은 채 경제적인 모든 짐을 홀로 지고 있다. 본인도 결혼 이야기를 입 밖에 내지 않고, 나와 엄마도 묻지 않는다. 어려운 이유를 다 알기 때문에, 또 알아도 어쩔 수 없기 때문에 언젠가부터 '결혼'은 아무도 입에 올리지 못하는 금기어가 되어버렸다. 가끔 예기치 않은 지인들의 도움이 있긴 했지만, 십오 년 이상 내 치료비와 수술비 대부분은 오빠가 감당해야 했다. 우리 가족의 생활비와 나와 엄마의 병원비뿐 아니라 대출금과 이자까지 갚느라 열심히 벌어도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생활이다. 20년 만에 낡아서 바꾼 주방과, 작년에 더위를 버티지 못하고 산 에어컨의 할부금부터, 세면대가 내려앉거나 전등이 고장 나는 등 사소한 수리비도 오롯이 오빠의 몫이다. 작년 내 다섯 번째 수술 때, 병실이 오래되어서 다인실에는 화장실이 없어 불편하다는 말에, 흔쾌히 하루에 23만 원 하는 2인실을 쓰라던 사람도, 또 그 비용을(일부는 보험에서 나왔지만) 아무 말 없이 갚은 사람도 그였다.         

  

 오빠의 왼손에는 공이며, 악력기며 재활 도구가 자주 들려있다. 카투사로 복무할 때, 제대를 몇 달 앞두고 수류탄 사고를 당했다. 미군부대 신문에 나기도 했던 큰 사고였다. 오빠가 훈련 중 던진 수류탄이 잘못 터지는 설비상의 사고로 팔다리에 수십 개의 수류탄 파편이 박혔다. 현장에서 헬기로 병원으로 옮겨져 급히 수술을 받았다. 하지만 왼 팔에 빼지 못한 파편이 여전히 박혀있다. 신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서 수술하다가 잘못되면 손을 아예 못쓸 수 있기 때문에 수술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오빠가 피곤하고 힘든 날, 왼손을 쥐었다 폈다 할 때마다 엄마와 나는 그날의 사고를 떠올린다.          


 어릴 적 아빠는 사우디 건설현장에서 일하셔서, 유년 시절에도 세 식구만 있는 날이 많았다. 아빠가 없는 많은 밤을 지나며, 대여섯 살 무렵부터 오빠는 장난감 총을 가지고 잠이 들었다. 집에서 남자는 오빠 혼자이니까 엄마와 여동생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그 어린 시절부터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 어린 시절부터 총을 꼭 쥐고 자던 마음으로 지금도 나와 엄마를 위해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것일까. 엄마는 오빠의 어릴 적 이야기를 종종 하시며 어린 시절부터 가볍지 않았던 그의  삶의 무게를 곱씹곤 한다.          


 나는 늘 오빠에게 미안한 마음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롤러코스터를 타는 건강 때문에 속상하고, 그래서 모든 짐을 오빠가 떠안고 있는 것이 늘 마음에 걸려있다. 내가 이렇게 아프지 않았다면 오빠는 남들처럼 평범하게 가정을 꾸리고 잘 살 수 있었을 텐데. 내 병이 오빠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마음이 급해지기도 한다. 나는 아파서 사람들과 사회와 거리를 둔 채 내 문제와 싸우고 있다. 하지만 늘 공부를 잘했고, 지금은 대기업에 다니는 오빠는 자신이 속한 사회 안에서 다른 소외감을 느끼면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스물여섯 이후 십칠 년 동안 육체의 아픔에 휩쓸려 내 삶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멀어져 왔다. 거센 물결은 나뿐 아니라 가족도 함께 휩쓸리게 했다. 새 해를 맞을 때마다 언젠가부터 내 나이에 둘을 더하고, 서른을 더하면서 오빠와 엄마의 나이를 함께 헤아려본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하는 내 삶을 향한 지친 질문이 그들의 삶과 연결되어있다는 자각에 이른다. 더 늦기 전에 내 병의 굴레에서 나뿐만 아니라 그들도 자유롭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어른이 되면>에서 발달 장애인 동생 혜정과 함께 살아가는 언니 혜영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이런 삶을 사는 것은 혜정이의 해방이 나의 해방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강력한 이기심과 이타심이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 위로가 된다. 오빠의 삶도 가족을 위한 희생만이 아니기를. 누군가의 삶이 나의 삶과 연결되어 있다는 자각이 삶을 얼마나 불편하게 하고 또 충만하게 하는지, 그 깊이와 넓이를 가늠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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