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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드 Jul 12. 2020

두려움을 응원한다

누군가를 응원한다는 건 그의 불안과 두려움을 함께 응원하는 것이 아닐까

- 언니, 제 친구 만날 수 있어요?     

 후배에게 연락이 왔다. 몸이 아픈 친구가 있는데 내 이야기를 했더니 만나고 싶어 한다고.     


 여름의 끝 무렵, 세찬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장화를 신고 얇은 바람막이 겸 우비를 입고 강남역의 약속 장소로 향했다. 이전에 후배 휴대폰에서 언뜻 보았던 사진 속 얼굴을 떠올리며 혼자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저기서 웃으면서 누군가 다가왔다.     


 그녀는 지금 4개월째 병가 휴직 중이라고 했다. 회사를 다닐 땐 힘들어서 쉬고 싶었는데, 막상 아파서 쉬게 되고 휴직 기간이 길어지니 불안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병원을 다니느라 운동화를 신고 편한 복장으로 다니다가 정장 입고 하이힐 신은 직장인 들을 보면 부럽다는 그 마음을 알 것 같았다. 나는 스물여섯, 대학교를 졸업하고 막 사회로 나가려는 무렵에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아프기 시작한 것이 내내 서러웠다. 학교나 직장을 다니는 또래들만 봐도 무작정 부러웠다. 내 아픔에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서러움이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 하지만 사회에서 소위 잘 나가는, 중견기업의 이사인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가진 것이 많을 때 내려놓는 것 역시 마찬가지로 어려운 일 같았다. 아프기 좋을 때란 없다. 그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의 문제만 있을 뿐.     


 그녀는 방광 이상으로 정밀검사를 받았고, 허리 통증과 족저근막염으로 여러 병원을 전전하고 있다고 했다. 일주일의 대부분의 시간을 치료받으며 보내고 있다고. 치료 기간이 길어지면서 두려움과 불안도 심해져서 신경정신과 약을 먹고 있다고 말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그 눈물을 보면서 지나간 내 모습이 떠올랐다. 온몸에 경련과 마비가 와서 4년 정도 누워있었지만 이제 오랜 재활로 많이 좋아졌다는 내 말에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기는 아파서 4개월째 휴직 중인데도 이렇게 힘든데 어떻게 4년을 누워있었느냐고. 그녀의 슬픔과 놀라움이 공존하는 표정을 보면서 나는, 두려움과 불안에 휩싸였던 오래전 기억으로 들어갔다.   

  

 미국에서 세 번째 수술을 받고 6개월 후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다시 턱뼈는 흔들렸고 턱관절은 덜컹거렸고 얼굴은 일그러졌다. 재발해서 턱뼈가 녹아 다시 뒤로 밀려들어가는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누우면 턱뼈가 더 쉽게 들어가 다시 기도를 막을까 봐, 침대에 눕지도 못했다. 침대 아래 앉아서 침대에 머리를 대고 선잠을 잤다. 나와 가족의 에너지와 시간과 돈을 모두 소진하고 이런 결과라니. 재발하면 골반 뼈를 이식해야 한다고 했는데. 죽을 수 없다면 기억이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기도했다. 고등학교 때 넘어져 턱관절을 다치고 수술과 재발을 반복하다 시들어가는 내 청춘은 실패라고 결론지어진 것만 같았다. 턱뼈가 다시 밀려들어갈 것 같다는 두려움에 휩싸여 방에 내내 웅크리고 앉아만 있었다. 침대에 눕지 못하고 침대 밑에서 뜬눈으로  밤을 새며 훌쩍이며 기도하다 잠든 어느 날, ‘누워도 괜찮아’라는 음성이 마음에서 들렸다. ‘눕는다고 더 나빠지는 건 아닐 거야.’ 그러자 두려움과 불안으로 가득 찼던 마음에 작은 균열이 생겼다. 평안이 조금씩 밀려들었다. 일주일 만에 침대로 올라가서 베개를 베고 누웠다. 두려움은 침대의 약 50센티를 올라가 눕는 것을 태산을 오르는 것보다 어렵게 했다.   


 강한 진통제를 먹어도 진정되지 않아서 한 달 후, 휠체어를 타고 다시 미국으로 들어갔다. 진단 결과는 다행히 재발은 아니었다. 근육 경련이었다. 이전에 한국에서 두 번 수술했을 때 절개했던 부분에서 경련이 시작된 것이라고 했다. 아직은 뼈에 이상이 없지만 수술한 뼈가 완전히 붙기 전이니, 급한 대로 근육을 마비시키는 주사(보톡스)를 여러 번 맞았다. 3개월 후 한국에 돌아왔다. 하지만 계속 경련이 일어나서 주사의 효과는 오래가지 못했다. 다시 온몸이 굳어졌고, 오랫동안 복용하던 독한 소염 진통제와 항생제 때문에 위까지 쓰리고 아파왔다. 급기야는 물만 마셔도 계속 구토를 하다가 한방병원에 입원했다. 양약을 끊고 침, 뜸, 한약으로 3개월 동안 치료를 받으며 한방병원에서 20대의 마지막을 마무리했다.      


 한방병원에서 잦아들던 통증은 퇴원 후 다시 시작되었다. 다리만 들어도 턱과 머리까지 아팠다. 다시 미국에 가거나 병원에 갈 기력도 재력도 이제 남아있지 않았다. 마음의 에너지도 모두 소진되어 아무런 의욕이 없었다. 그러자 통증과 불안과 두려움은 힘이 세졌다. 삶을 불평하고 저주하는 생각들이 빽빽하게 자라났다. ‘아파. 힘들어. 살기 싫어. 왜 나만. 이렇게 살아서 뭐해. 죽고 싶어.’ 이런 단어들로 마음이 가득 찼던 날들이었다.    

 

 ‘언니는 그 시간을 어떻게 견뎠어요?’라고 눈물이 맺힌 얼굴로 묻는 그 질문에, 침대에서 누워만 있다가 암흑 속에서 조금씩 빠져나올 때 붙잡았던 마음을 그녀에게 이야기했다.     


“뿌린 대로 거둔다. 갑자기 이 말이 무겁게 다가왔어. 진짜 거두기를 원하는 것은 건강하게 회복되는 것인데, 마음과 생각으로는 온통 불평과 불안과 두려움을 심고 있더라고. 그렇다면 모순 아닌가. 부정적인 마음과 생각을 하루 종일 심으면서 긍정적인 미래를 거두지 못해 불평하는 게 말이야.”     


 너무 간절해서 더 많이 불안해질 때가 있다. 길이 하나뿐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의 여유가 없어진다. 그래서 자신이 그리던 길과 다른 길에 서는 순간 최악을 상상한다. 후배의 친구도 그 최악의 상상이 삶을 덮치는 두려움과 불안을 이야기했다. 생각하는 대로 된다는 소위 긍정의 힘을 나는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뿌린 만큼 다 거둘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아무리 몸과 마음을 다 해도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부지기수이므로. 하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았을 때 자신을 지켜내기 위한 긍정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불평의 마음이 가득 쏟아져 나올 때, 진짜 원하는 마음을 심을 수 있는 작은 결단이 삶을 전환시킬 수 있을 테니까. 고통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사람과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다가 알았다. 내게 세상과 단절되었던 4년의 시간은 두려움 극복하는 시간이 아니라 두려움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익히는 시간이었다는 것을.     


 울며 웃으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시간이 많이 흘렀다. 병원에 가기 위해 일어나는 그녀와 헤어지며 생각했다. 고통이 내게 준 가장 큰 유익은 타인이 아픔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아닐까. 고통을 겪어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고통을 겪었기에 아무도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뿐이다. 고통과 불안과 두려움의 절대성 앞에 모두는 약자일 수밖에 없으므로.     


 가을이 깊어갈 무렵 그녀에게서 복직한다는 문자가 왔다. 완전하진 않지만 많이 회복되었다고. 축하 문자를 보내면서 생각했다. 누군가를 응원한다는 건 그의 불안과 두려움을 함께 응원하는 것이 아닐까. 삶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갈 때 존재하는 디폴트 옵션 정도로 여긴다면, 불안과 두려움에 잠식당하지는 않을테니까. 그렇다면 마흔이 훌쩍 넘도록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내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부터 좀 응원해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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