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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드 Oct 24. 2021

보호자 연습

엄마도 나를 믿고 약해질 수 있을까

 “엄마는 아직 아프면 안되는데.”     


 건강 검진을 했던 병원에서 엄마에게 재검 요청 전화가 왔다. 혈변이 나왔다는 이야기와 함께. 엄마는 대장 내시경 날짜를 잡기 위해 병원을 다시 방문했고, 담당 의사는 치질 여부를 물었다. 평소에 치질이 없다는 엄마의 대답에, 그러면 암일 가능성이 높으니 빠른 시일 내에 대장 내시경 검사가 필요하다고 했다.      


 식탁에 앉아 이야기하다가 대장내시경 날짜가 정해졌다는 엄마의 말에 내 입에서는 불쑥 아직 아프면 안된다는 말이 튀어나왔다. 아픈 딸을 둔 엄마는 아플 권리도 없는 것처럼. 아픔에 순서나 적기가 있는 것도 아닌데, 아직은 내가 치료중이니까 지금 당신의 아픔은 직무유기라도 되는 것처럼.     


 내 어릴 적 기억의 엄마는 지금보다 마르고 창백했다. 사십 대 초반에 자궁내막증으로 자궁과 난소 전 절제를 했지만, 초등학생이던 내게 엄마의 수술은 그저 일주일 정도 집에서의 부재였다. 그리고 수술 몇 년 후, 엄마의 눈을 보며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한다. ‘엄마, 눈알이 노래졌어.’ 수술 후 복용하던 호르몬제 부작용으로 급성 간경화가 진행되어 황달이 왔고, 다시 엄마는 병원에 입원했다. 이후 엄마는 기름지거나 조미료가 강한 음식을 먹으면, 때로는 마음이 힘든 일이 있으면 식사 후 화장실에서 자주 구토를 했다. 처음에 놀라던 나는 차츰 그 소리에 익숙해졌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엄마는 조금 더 강하고 담대한 사람이 되어있었다. 그 언젠가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나와 오빠가 아프기 시작할 무렵에 가 닿는다. 토하는 횟수도 줄었고, 살이 오르고, 병원에서도 집에서도 눈물을 보인 적이 거의 없다. 그런 게 책임감의 무게인걸까. 여러 번 수술하는 딸과 군대에서 수류탄 사고를 당한 아들을 돌보며 엄마는 가진 것보다 강한 사람이 되어 갔는지도 모른다. 당신까지 아프면 안된다는 절실함이 엄마의 마음만 아니라 육체까지 단단하게 만들었던 걸까.     


 이번 대장내시경 검사에는 내가 동행하기로 했다. 우리나라 뿐 아니라 미국까지 가서 내가 수술을 받을 때, 엄마는 늘 곁에 있었다. 하지만 엄마가 아플 때는 엄마 혼자거나 다른 사람이 동행했다. 귀 뒤에 악성종양이 생겨서 수술을 받을 때, 어지럼증과 구토 때문에 MRI 검사를 받을 때 오빠나 친척이 동행했다. 이제 내 건강이 좀 나아졌으니 내가 엄마와 같이 가기로 마음먹고 그날 일정을 다 비워두었다. 그런데 막상 시간이 다가오자 가고 싶지 않았다. 아니 싫다기 보다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만약 내가 처음 병원에 같이 갔는데, 나쁜 결과가 나오면서 어떻게 하나 하는, 그렇다면 왠지 그게 다 내 탓일 것만 같은 두려움. 누군가 그런 말을 했다면 그건 미신적인 생각이라고 비웃을 나였지만, 이상한 두려움에 휩싸여 오빠가 혹시 휴가를 내지 않을까 며칠 동안 눈치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내가 동행하게 되었다.     


 ‘정말 두려운 게 뭐지?’ 

병원에 함께 가기 이틀 전, 침대에 누워서 두려움의 실체에 대해 골똘히 생각했다. 내가 같이 가면 나쁜 결과가 있을 것 같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엄마 대장의 상태가 누가 같이 가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므로. 혹시 좋지 않은 상황이라도 그건 내 탓이 아니었다. 내가 진짜 두려운 것은 보호자가 되는 것이었다. 이십년 가까이 줄곧 환자였던 나는, 내 육체의 고통을 감당하는 것도 벅찬 삶이었다. 내 자리는 환자에 오래 고정되어 있었다. 그래서 엄마가 늘 서있던 보호자의 자리를 나와 바꾸어야하는 그 상황이 어색하고 겁이 났던 거다. 아기가 없어 한 생명을 책임져 본 적이 없고 강아지나 고양이 같이 펄떡거리는 생명을 거둔 적도 없는 나는, 지금까지 누구의 보호자의 자리에도 서 보지 못했다.     


 일흔이 훌쩍 넘은 엄마가 언제까지 내 보호자 일 수 많은 없는 노릇이다. 나이만큼 노쇠한 장기와 관절들이 이미 조금씩 아우성을 내고 있다. 내가 보호자가 되는 날이 앞으로 더 많아지는 것이 당연하다. 나는 엄마처럼 성실한 보호자가 될 수 있을까. 내가 수술할 때마다 아침부터 밤까지 꼬박 곁을 지키고, 오빠의 사고 때 미군 용산기지를 힘든 내색 않고 매일 오가다가 우리가 퇴원하고서야 앓아 눕곤 했던 엄마. 올케의 암 수술 때, 열흘 이상 새벽 4시 무렵의 첫 버스를 타고 병원으로 향하던 엄마. 간이 좋지 않으니 무리하지 말라던 말에, 암 수술한 사람도 있는데 내가 뭐가 힘드냐, 던 엄마. 나도 아직 환자 생활을 벗어나지 못했지만, 엄마가 아프다면 이제 내가 보호자가 되는 게 맞겠지. 직장에 다니는 오빠보다 내가 스케줄을 조절하기 쉬우니 다행이다 싶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검사날 아침, 나는 늦게 일어나(엄마는 미안해서인지 나를 깨우지 못했다) 허둥지둥 서둘러 병원에 갈 준비를 했다. 내가 엄마를 모시고 가는 게 아니라 엄마가 나를 데려가는 것 같은 이상한 상태로 서둘러 집을 나섰다. 병원에서 핑크색 꽃무늬 상의에 푸른 하의로 된 환자복을 입은 엄마가 내 앞에 섰다. 엄마의 어깨가 이렇게 작았었나. 검사를 받으러 들어가는 엄마의 뒷모습이 두 뼘에 들어올 듯 왜소해 보였다. 내가 수술할 때 병원을 오가던 엄마는 훨씬 든든하고 크게 보였는데, 부쩍 많아진 흰머리 사이로 지나간 세월이 밀려들었다. 엄마는 여전히 엄마여야 해서, 그 자리에 있어야 해서 엄마가 나이들어가는 것을 애써 외면하고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의연한 보호자가 되겠다고 마음을 먹고 나니 맘이 편해져서 그런지, 병원에서 기다리는 시간은 긴장되지 않았다. 마음이 편하니 왠지 검사 결과가 나쁘지 않을 것 같은 믿음도 생겼다. 책을 읽고, 보온병에 담아 온 물을 홀짝이면서 인터넷 검색을 하다보니 엄마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진료실에 엄마를 따라 들어가서 보호자 자리에 앉았다. 다행이 결과는 암은 아니었다. 혈변은 항문 안쪽에 작은 치질 때문이었고, 대장은 용종도 없이 깨끗하다고 했다. 위나 식도염은 있지만 그 나이에 흔한 증상 정도였다.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서둘러 오빠에게 엄마가 괜찮다는 메세지를 보냈다.     


 갑자기 배고픔이 밀려왔다. 검사 때문에 금식한 엄마가 먹을 수 있는 음식점을 검색해서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메뉴는 전복죽과 가자미 미역국. 내가 됐다는 데도 엄마는 계속 자기 전복죽에서 전복을 골라 내 밥그릇에 놓았다. 자식에게 맛있는 거 먹이고 싶은 엄마의 본능은 내가 따라갈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이다. 잘 차려진 한 상을 먹고 집에 돌아오는 버스에서 생각했다. 좋은 보호자가 되기 위해 우선 내가 더 건강해져야 겠다고. 엄마가 견뎌 온 책임감의 무게를 따라갈 수는 없겠지만, 짊어져야 하는 삶의 무게를 견디며 내 몸과 마음도 강해질 것이다. 여전히 나는 엄마에게 일상의 많은 부분을 의지하고 있고, 엄마는 아직도 아프면 안되는 존재이다. 하지만 엄마가 아기처럼 약해질 수밖에 없는 어느 날엔 나를 믿고 마음껏 약해질 수 있을까. 내가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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