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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드 Oct 24. 2021

마음의 전투

완치라는 허상

 검사 결과지를 보던 내 눈이 빨간 표시에 동그래졌다. 안경을 치켜올리며 진료실 의자를 당겨 앉았다. 거금을 들인 기능 의학 검사지는 수십 개의 수치와 그래프로 촘촘했다. 염증 수치가 정상보다 다섯 배 높거나, 철분이 모자라는 등 대부분의 이상 수치는 납득할만 했다. 그런데 도파민호르몬 그래프의 오른 쪽 맨 끝 빨간 점이 유독 눈에 띄었다.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조금 높은 것이 아니었다. 이 빨간 점은 안드로메다로 날아갈 듯한 기세였다. 그래프에 표기할 수 있는 최고치를 넘어선 이상수치였다.     


 도파민이 부족이 아니라 과다라니. 도파민은 성취나 쾌락과 관련된 호르몬 아닌가. 이 결과는 재발한 난소 수술을 3개월 미루고 병원을 전전하는 내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며칠 전 산부인과 의사에게 초음파 검사 결과를 들었을 때처럼 어리둥절했다. 동기부여와 욕구 충족을 통해 인생의 재미를 느낄 때 올라가는 호르몬이 병원에 매여 지루한 삶을 살고있는 나한테 이렇게 올라갈 수 있나. 도파민 과다와 관련 있는 중독이나 조증, 조현병도 나에겐 해당사항이 없었다. 차라리 우울증 환자처럼 세로토닌이 낮고 노르에피네프린이 높았다면 수긍을 했을 것 같은데, 도파민을 제외한 나머지 호르몬은 모두 정상이었다.     


 “검사 결과가 이상해요.” 의사에게 도파민 그래프를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도파민이 과다할 만한 조건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십여 년 동안 아파서 누워있거나 치료받는 일이 삶의 대부분이었고, 지금도 다시 수술을 앞두고 있어 무기력하고 의욕도 없다고. 내 검사지를 찬찬히 들여다보던 의사는, 정말 우울하고 무기력한 사람에게서 나올 수 없는 결과에요, 라고 말했다. 통증 때문에 늘 깊이 잠들지 못하는 상황이 도파민 과다에 영향을 줄 수 있냐는 내 질문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이 전투 상태라서 이렇게 나올 수 있어요.”    

 

 전투 상태. 그러고 보니 지난 십오 년 이상은 전투의 연속이었다. 그 싸움은 병과의 싸움이기도 했지만, 병이 휩쓰는 폐허에서 마음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었다. 통증을 견디고 수술을 받고 재활을 하면서 불안과 우울과 무기력이라는 총알이 사방에서 날아들었다. 총탄에 맞아서 며칠 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고 누워있다가도 곧 몸을 일으켰다. 전투란 맞서 싸우지 않으면 공격당해 죽을 수 있는 상황. 정신을 가다듬고 운동을 하고 치료를 받으며 치열한 하루를 보냈다. 상처가 아무는 와중에 또 수술이라는 폭탄이 터지면 한참을 웅크리고 있었다. 노력에 배신당해 피를 흘리는 마음을 지키려고 방탄복을 입었다. 검사를 받던 날도 밤을 꼬박 새우고 몽롱한 상태로 억지로 몸을 일으켜서 병원으로 향했었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각성 상태인 채로, 바짝 긴장하며 우울하고 두려운 감정들과 대치하고 있던 세월이 오래였다. 그렇게 마음을 지키는 과정에서 도파민 수치는 계속 높아졌나보다. 하긴 전쟁터 한복판에서 모든 호르몬이 정상이라는 게 더 이상하지 않은가. 높은 도파민 수치는 전투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싸운 증거라고 할 수도 있겠다. 누군가의 높아지고 낮아진 호르몬 수치, 우울증과 무기력도 싸움의 패배를 의미하지 않는다. 저마다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자신의 방식으로 애써 싸운 다른 증거일 뿐이었다.      


 3개월 후, 다시 초음파 검사를 받았다. 초음파 검사를 하던 의사가 내 배를 이리저리 누르며 통증과 출혈의 정도를 물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커튼 밖으로 나가 주치의에게 전화를 걸었다. 주치의는 급하게 뛰어왔고 둘은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다시 전장 깊숙이 들어가야 한다는 신호를 감지했다. 긴 검사가 끝나고 진료실로 향하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수술을 피하거나 지연시키고 싶었던 모든 노력은 소용없었다. 우측 난소의 종양의 모양이 좋지 않고, 암 의심 소견도 있어서 더이상 수술을 미룰 수 없다는 의사의 말이 마음에 박혔다. 자궁에도 폴립과 근종이 다시 생겼고, 자궁 내막 상태도 좋지 않아 조직 검사도 필요하다며 수술 날짜를 서둘러 잡았다. 별일 아니라고 마음을 다독이며 집으로 돌아왔다. 사실, 얼마동안 지속되었던 출혈의 정도와 배의 통증은 내가 조금 더 힘든 싸움을 해야 한다고 이미 말해주었다. 피하고 싶었을 뿐 의외의 공격을 당한 건 아니었다.     


 수술을 기다리던 나는, 친구의 전화를 받고 다시 바빠졌다. 의사인 친구는 다른 병원을 더 가볼 것을 권했다. 사실, 나는 귀찮고 지겨워서 다른 병원에 더 가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검사를 받는 과정이 싫었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재발했다면 다른 의사에게 수술 받는 게 더 좋은 선택이라는 친구의 말에 마음을 바꿨다. 다시 병원을 검색하고, 예약하고, 빼곡한 환자기록을 작성하고, 굴욕 의자라 불리는 초음파 의자에 누워서 검사를 받았다. 의사들의 의아한 얼굴과 난감한 얼굴을 마주하는 상황을 반복해서 겪으며 피로가 밀려왔다. 미혼에 이미 아기를 낳기 어려운, 이미 자궁도 난소도 멀쩡하지 않은 내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고생해야 하나. 덧없는 원망이 수도 없이 마음을 비집고 올라왔다.      


 당장 귀찮은 과제를 해나가는 심정으로 병원 두 곳을 더 오갔다. 버스에서, 대기실에서 초음파실에서, 아무 때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공부도, 직업도, 치유도 간절히 원하는 것에서 철저히 멀어지면서 하고 싶지 않은 것들만 차곡차곡 해야 하는 삶은 형벌 같았다. 다른 때 같았으면 마음으로 날아드는 총알을 피하려고 애썼겠지만 이제 그러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아프고, 늙고, 힘든 게 삶이라면 너무 애쓰고 싶지 않았다. ‘간절해지지 말자, 간절해지지 말자’고 주문처럼 되뇌었다. 여러 종류의 전쟁터를 떠날 수 없는 게 삶이라면 벗어나기 위해 너무 애쓸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다시 수술을 받았다. 이번 진단서는 이전보다 더 빼곡했다. 자궁근종, 자궁내막증, 자궁 폴립, 난소의 양성 신생물, 나팔관의 이형세포, 골반 복막 유착. 몇 개월 전 수술했던 내 배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앞으로 또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의사가 최선의 방법이라고 했던 지시사항을 다 따랐다. 식단도 철저히 관리하고 운동도 꾸준히 했다. 근육통 때문에 오랜 수면 부족은 당장 개선하기 어렵다. 엄마를 닮아 유전적으로 약하게 타고난 자궁과 난소는 내가 건강을 잘못 관리한 탓이 아니다.     


 완치란 허상이었다. 오염된 환경이 끊임없이 건강을 위협하는 세상에서 완전한 치유를 바라는 자체가 불가능한 목표 설정이었다. 더구나 한번 무너진 몸은 다른 공격에도 취약한 상태가 된다. 완치라는 이룰 수 없는 목표 때문에 매번 더 많은 좌절을 겪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는 압박 속에 스스로를 가두지 않기로 했다. 전쟁터를 떠나기 위해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아 붓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오랜 전투에서 깨달은 건 내가 생각보다 강하다는 사실이었다. 아니 전쟁터에서 살아남으며 조금씩 강해지고 있었다. 매번 상상보다 더 나쁜 상황을 겪었지만 기대보다 잘 살아남았다. 다시 힘든 일이 다가온다고 해도 잘 통과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상흔과 함께 자라났다. 나는 다시 많은 에너지를 다해 치료받고 나아지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축 처진 몸과 마음을 일으켜 전진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간절해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 목표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통 한가운데를 잘 통과하기 위해서이다. 아픔을 극복하기 위해서 아픈 몸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므로. 육체의 아픔이 펼쳐놓은 오랜 전투에서 얻은 건, ‘완전한 치유’가 아닌 ‘완전한 치유로부터의 자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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