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드 Oct 24. 2021

구름원정단을 꿈꾸며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라

 2019년 6월 22일 토요일, <구름원정단>에 합류했다. 원정 장소는 혜화동 로터리의 오래된 서점. 모퉁이가 부식된 ‘동양서림’ 간판 아래, 서점 속 서점으로 시집 전문 서점 ‘위트 앤 시니컬’이 2층에 자리잡고 있다.      

 며칠 전, 위트 앤 시니컬 블로그에 [시적물체탐구 특강] 이라는 포스팅이 올라왔다. 제목은<구름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것들>. 나는 얼른 신청 설문지를 작성했다. 신청 이유에는 ‘하늘을 좀 더 자주 올려다 보고 싶어서’ 라고 적었다.     


 하늘을 올려다 보지 않는 것이 내 오랜 습관이었음을 자각한 것은 동네 친구를 통해서였다. 친구는 아파트 단지 안에서도, 버스 정류장에서도, 영화관을 오가는 길에도, 수시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구름을 가리키며 감탄하고 순간의 아름다움을 담기 위해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친구의 감탄사를 따라 올려다보는 하늘은 늘 거기에 있었는데 놀라울 만큼 근사하고 낯설었다.     


 턱관절 질환으로 얼굴이 일그러지면서부터 시선은 땅에 고정됐다. 의도적으로 땅을 보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보지 않기 위한 머리의 각도였다.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서, 길에서 마주친 지인을 마주하기 싫어서, 병원을 오가면서 학교나 직장을 다니고 여가를 즐기는 또래들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서 고개를 들지 않았다. 모자로 시야를 가린 채, 근육이 경직되는 통증의 아우성에 사로잡힌 몸은, 몸 밖의 다른 변화에 점점 둔감해졌다.      


 “누군가 진짜로 하늘을 올려다본다면 그 순간 마음속에 있는 두려움이나 희망과 관련된 소망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라는 존 버거의 말처럼, 하늘을 올려다보는 건 단지 보는 행위 이상이다. 중력을 거슬러 목의 각도를 뒤로 젖히는 작은 움직임은, 멀어진 소망이나 희망을 꿈틀거리게 한다. 하지만 나는 희망을 떠올리는 것이 괴로웠다. 내가 바라는 것과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이룰 수 없는 오랜 바램은 날카롭게 마음을 할퀴었다. 희망이 상처가 되었다. 그래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사람이 되기 위해 애썼고, 고개를 들어 멀리 보지 않았다. 이따금 하늘을 봐야지 생각해도, 습관처럼 굳어진 고개의 각도와 시야의 범위를 바꾸는 게 쉽지 않았다.     


 오후에 집을 나서 특강 장소로 향했다. 한 켠에 마련된 넓은 책상 모서리에 자리를 잡고 한숨 돌리고 나서야 깨달았다. 일 년 중 낮이 가장 길다는 하지, 오후 일곱시 반 특강이 시작할 때까지 하늘을 제대로 올려다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더군다나 구름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러 왔는데도 오는 동안 하늘의 구름을 제대로 올려다보지 않았다니. 습관이란 참 질기다.      


 특강은 서점 주인의 인사말로 시작되었다. 시인인 그는 구름은 십 분 이상 가만히 보고 있어도 전혀 지루하지 않은 몇 안되는 사물이고, 이런 것을 ‘시적 물체’라고 부를 수 있다고 했다. 이후의 시간은 기상예보사가 담당했다. 구름 덕후라고 밝힌 그는 하늘을 관찰하고 감상하는 것을 좋아해서 기상학과에 진학했고, 기상예보사가 되었다고 했다. 고개를 들면 마음을 두근거리게 하는 것이 늘 존재해왔던 삶이 충만해 보였다.   

  

 하늘과 구름의 사진을 보며 구름의 이름들을 적었다. 적운, 층운, 층적운, 고적운 고층운, 난층운, 권운, 권적운, 권층운, 적란운. 중고등학교 때 과학 시간에 배웠던 구름 10종의 이름들을 입으로 중얼중얼 따라 읽었다. 해무리, 달무리, 쌍무지개 등 하늘에 해와 구름과 비의 작용으로 생기는 여러가지 현상을 살펴보았다. 국제 우주 정거장(ISS)에서 타임 랩스로 지구를 찍은 영상은 장관이었다. 한눈에 보이는 하늘과 바다, 불빛과 구름, 구름 속 번개까지, 움직이는 예술작품이었다. 지구 밖에서 본 먹구름 속 번개는 지구를 감싸는 빛의 운율 같았다. 구름뿐 아니라 하늘 전체가 시적 물체였다.     


 물방울이나 작은 얼음으로 이루어진 구름은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거친다. 대기와 지표면의 상태에 따라 수증기가 응결하는 방식은 단 한 순간도 같을 수 없기에, 우리가 바라보는 지금 이순간의 구름은 단 한번 뿐인 유일한 구름이다. 내 머리 위로 흘러가는 구름과 하늘은 생성과 소멸하는 사이에 내게 펼쳐진 찰나의 선물이다. 그것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에게만 잠시 눈과 마음에 담을 수 있도록 허락된다.  머리 위의 세상은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우리가 땅에서 살아가는 삶과 참으로 닮아 있었다.     


-구름은 대자연의 시이며 최고의 평등주의자이다. 사람을 가리지 않고 환상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 매일 구름 한 점 없는 단조로운 하늘만 돌려봐야 한다면 인생을 너무도 지루해질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구름은 하늘의 감정 표현이며 사람의 얼굴 표정처럼 읽어낼 수 있음을 알리고자 한다. 우리는 구름이 몽상가를 위해 존재하며 사색이 몽상가의 영혼을 이롭게 한다고 믿는다. ... 그리하여 귀 기울기는 모든 자에게 이르노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라. 그 덧없는 아름다움에 경탄하라. 그리고 공상을 즐기며 인생을 살라.- <구름감상협회 (The Cloud Appreciation Society) 선언문> 중 일부     


 구름 감상협회의 이 진지하고 익살맞은 선언문을 읽으면서, 어쩌면 그동안 나는 너무 안전하고 평범한 희망을 바랐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상처에는 평범한 삶에서 소외된 쓰라림이 자리잡고 있었다. 하지만 물방울과 얼음 결정만으로 단 한 번도 같은 모양을 만들어 내지 않는 구름을 보고 있자니, 누구나 꿀 수 있는 꿈 말고 좀 더 헛되고 쓸모없는 것을 꿈꾸는 몽상가가 될 필요를 느꼈다. 매순간이 고유한 구름처럼 우리 삶도 매 순간 생성되고 소멸된다. 늘 비숫한 것 같지만 어느 순간도 똑같지 않다. 그렇기에 일상에서 샘솟는 사소한 바람들에 귀를 기울이고 몸을 맡기고 싶어졌다.      


 하늘을 바라본다. 오늘은 적운과 고적운의 조합이다. 인상파 화가의 그림을 능가하는 유려함을 감탄하며 휴대폰을 들어 셔터를 눌렀다. 아무리 잘 찍으려고 여러번 시도해도, 사진에는 그 경이로움의 일부만을 담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내 머리 위를 지나는 구름의 이름을 불러보고, 그 변화의 패턴을 그려보는 일만으로도 하늘을 바라보는 일이 훨씬 즐거워졌다. 하늘과 나의 거리가 내가 세밀하게 관찰하는 만큼 가까워졌다. 오래도록 하늘을 바라보다 소망을 읊조렸다. ‘덧없이 하늘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기는, 진짜 구름 원정단이 되고 싶다.’ 

이전 26화 아무튼, 플라잉요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