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나라의 예체능

휴직일기, -125일(2021.10.26)

by 낙산우공

1979년의 10.26이라는 다소 부끄러운 역사적 사건을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2021년의 10.26은 꽤 오랫동안 나의 뇌리에 박혀 있을 것만 같다. 무용과 미술을 전공하는 딸과 아들의 대학입시와 예고 입시가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전환의 시기이기 때문이다. 아침부터 학교 앞은 학생과 학부모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학교 앞 비좁은 골목은 학교 측의 교통정리에도 불구하고 차와 사람이 뒤섞여 아수라장이 따로 없다.


새벽부터 일어나 준비를 마친 둘째 아이는 밝게 웃고 있으나 긴장감을 숨기지 못했다. 아마도 태어나 열여섯 해 동안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상황이 낯설고 불안할 것이다. 무려 2년 하고도 3개월 동안 이 한 번의 시험을 위해 준비를 해왔고 특히 전문 입시학원으로 옮긴 9개월 간은 그야말로 고난의 행군이라 불러도 손색없는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이렇듯 경쟁은 인간성을 말살하고 그 삭막하고 황량함에 숨을 멎게 하는 특성이 있다. 경쟁 없는 사회를 꿈꾸지만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지배하는 산업화 현대사회에서 집단화와 선택은 필연이 되었다. 자연스럽게 경쟁과 탈락도 일상이 되었다.


경쟁의 맹점은 바로 탈락에 있다. 낙오를 전제하지 않고는 경쟁력 있는 품질을 보증하지 못하고 탈락의 공포가 인간에게 놀라운 향상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논리는 채찍 없이 경주마를 달리게 할 수 없다와 같은 말이다. 결국 경쟁은 인간을, 코뚜레를 뚫은 채 밭을 가는 소나 눈을 가린 채 마차를 끄는 말과 동급으로 만들어 버렸다. 여기에 인간의 경쟁이 더 비인간적인 것은 경쟁에서 탈락한 인간에게 낙오자라는 낙인을 찍고 다음의 경쟁을 준비하는 인간에게 탈락의 공포를 심어주어 더 극심한 경쟁을 유도한다는 것이다.


이런 비인간적인 경쟁의 구조를 혐오하는 나는 내 아이들이 경쟁의 노예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경쟁은 현재의 행복을 저당 잡힌 채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스스로를 혹사시키는 희망고문이다. 그 시스템에 순응하는 순간 나 역시 누군가의 낙오를 혹은 자신의 낙오를 감수해야 한다. 결국 경쟁사회란 단군할아버지가 나라를 여신 뜻과는 한참 동떨어진 것이고, 홍익인간은 개나 줘버리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경계한 것은 경쟁에서 탈락하지 않은 자들의 오만이 또 다른 경쟁을 부추기는 경쟁 중독 세상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경쟁을 피해서는 살아가기 힘든 것이 현대인의 삶이다.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경쟁과 생존이 반복되기 마련이다. 나 역시 그러한 삶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아이를 대안학교에 보내거나 속세와 등진 채 심산유곡을 유랑시키지 않고서는 말이다. 게다가 내 아이들은 경쟁시스템에 매우 일찍 그리고 혹독하게 노출되는 예체능을 전공하고 있다. 결국 아이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아이가 경쟁에 매몰되지 않고 따뜻한 인간성을 간직할 수 있도록 멘탈을 관리해 주는 것과 나름의 사전 공부를 통해 생존확률이 상대적으로 높은 경쟁 환경을 제공하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틈나는 대로 이렇게 주입시키곤 했다.


경쟁은 매우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제도다. 다만 너희가 스스로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경쟁에 참여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경쟁에서 생존했다고 자만할 일도 아니고 경쟁에서 낙오했다고 절망할 일도 아니다. 그저 너의 꿈을 이루기 위한 간절함만 간직하고 담담하게 경쟁을 받아들이자. 세상은 단 한 번의, 혹은 단 한 가지의 경쟁으로 성패가 갈리는 단순한 세계가 아니다. 너는 그저 꿈을 실현하기 위해 마련된 한 가지 경쟁에 도전했을 뿐이고 그 결과가 어떻든지 간에 너에겐 향상된 실력이 남겨졌다. 그럼 된 거다.


이렇게 지껄이고 있지만 게운치 않은 기분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결국 나도 현실과 타협한 채 뜬구름 잡는 이야기로 스스로를 합리화하고 있을 뿐이니까 말이다. 대학입시 때 전기, 후기 단 한 번씩만 대학에 지원할 수 있었던 나의 고3 시절, 유독 시험운이 없었던 내 친구는 삼수를 하면서 무려 여섯 번의 입시 고사(당시엔 대학 입학 학력고사라고 불렸던)를 치렀다. 그 친구는 지금 한의사가 되어 잘 살고 있지만 한 때는 시험이란 이골이 난다며 운전면허시험조차 거부했던 기억이 난다. 경쟁이 남긴 상처는 아무는데 오랜 시간이 필요하며 때로는 영영 치유되지 못하기도 한다. 그렇게 과거에 매여 사는 많은 이들이 경쟁의 희생자다. 우린 꽤 많은 희생자를 양산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입시든 취업이든 살인적인 경쟁률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오늘의 감상,

미술 입시를 위한 실기시험을 볼 때엔 새 팔레트에 새 물감을 풀고 붓도 모두 새 것으로 준비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아이가 전해준 것은 그저께 밤이었다. 나는 어제 하루 종일 화방을 뒤져 필요한 미술도구를 새롭게 준비했다. 혹시 물통이 엎어질 것을 대비해 입시용 물통까지 두 개를 마련했다. 문제는 새 팔레트에 풀어놓은 55색의 수채화 물감은 하룻밤 만에 쉽게 마르지 않는다는 사실. 팔레트를 접어 가방에 넣었다가 시험장에서 열었을 때 물감이 온통 흘러내려 팔레트가 엉망진창이 되어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학원에서 비슷한 경험을 했던 적이 있었다. 나는 밤늦은 시간 아이를 학원에서 데려오자마자 헤어드라이어를 들고 물감을 말리기 시작했고 결국 밤새 선풍기를 틀어 그럭저럭 흐르지 않을 만큼은 만들었다. 이 애달프고 간절한 마음이 시험장까지 전해지기를 바라고 또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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