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타인(2018. 2.18)
낯선 사람을 만나는 일을 즐기지 않고, 그런 만남이 예상되는 자리를 꺼리는 성향은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 탓이려니 했다. 그리고 딱히 해야 할 말도, 혹은 하고 싶은 말도 없는 상황에서 기계적으로 이어지는 형식적이고 진솔하지 못한 대화를 끔찍하게 싫어하기도 했다. 영혼 없는 대화만큼 공허한 것이 있을까? 특별한 용무가 있는 공적인 만남이라도 식사나 술자리는 되도록이면 피했다. 그렇게 협소해지는 인간관계에 대해 위기의식을 느껴본 적은 없다. 내 나이의 사람들이 갖는 인간관계라는 것이 대부분 희미해지는 자존감을 회복하거나 사회적 우월감을 과시 내지 확인하는 도구로 전락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가족도 없이 하루 종일 말 한마디 나눌 대화 상대조차 없는 삶이 내게 전개된다면, 그때는 반려견을 키우고 그마저도 쉽지 않다면 수행자의 삶으로 남은 생을 채울 수도 있으려니 막연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깨닫게 된 것은 대인관계로 인한 불편한 감정 소모에서 오는 피로감보다 하루 종일 입을 닫고 사는 무료함을 견디기 힘들 수도 있겠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대인기피증이 있지만, 한편으로 평균 이상의 수다본능을 갖고 있다는 것을 망각해 왔던 것이다. 내 속사포처럼 내뱉는 언어의 향연을 온전히 받아주는 이는 지금까지는 주로 내 아내와 내 아이들이었다. 그들도 이젠 내성이 생겨 적당히 흘려듣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티 나게 무시하지는 않는다. 그 밖에도 꾸준히 만남을 갖는 친구 그룹과 직장 동료 그룹이 있지만, 그 존재의 필요성을 인정하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두 번의 명절을 비롯하여 일 년에 서너 번은 부모, 형제, 자매와 가족모임을 하게 된다. 오늘의 이야기는 바로 이 가족모임이다. 낯선 이들과의 불편한 만남을 극도로 싫어하는 것과 달리 익숙한 이들과의 편한 만남은 삶의 활력소가 된다. 경제적으로 독립하여 결혼을 하기 전까지 부모와 형제보다 가깝고 익숙한 존재는 없다. 친구밖에 모르는 어린 시절이 있지만, 그것은 또래 집단과의 교류가 세상 무엇보다 재밌는 젊은 날의 이야기다. 대부분 나이를 먹고 현실의 삶에 치이며 살다 보면 친구들과의 만남 자체가 드물어지고 서서히 관계는 소원해진다. 그러다가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반갑기도 하지만 더 이상 공통의 대화 소재가 없다는 사실을 금방 인식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만남은 더 멀어진다.
그러나 가족은 다르다. 자주 보지 않아도 서로 소식을 전하기 때문에, 오랜만에 만나도 할 이야기가 있고, 어색하거나 불편하지 않다. 우애가 각별한 형제자매는 더 그러하리라. 그렇게 명절, 부모님 생신과 같은 특별한 날의 모임은 삶의 생기가 시들어가는 중년의 나에게는 때때로 기다려지는 날이 되기도 하였다. 그렇게 익숙한 만남의 경우 나름대로 즐겨왔다고 믿었던 내게 이번 설 연휴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내내 심기가 불편하였다. 그 이유를 본가와 처가 순방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오늘에야 알게 되었다. 낯선 이들과의 만남을 불편해하듯, 낯익은 이들과의 만남이 불쾌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내게는 모두 낯익고 편한 이들뿐인데, 왜 그들과의 만남에서 이토록 마음이 편하지 않은가 하는 궁금증에 대한 나의 결론은 불쾌함이었다.
익숙한 대화의 뒤끝이 개운하지 않았던 것은, 자연스레 내뱉는 말끝에 가시가 돋아있었기 때문이다. 그 말에 가시가 돋아있었는지 내 귀에 돋아있었는지도 이제 분간하기 어렵다. 그저 그 평범해 보이지만 둥글지 않은 말들이 내 마음속에 조그만 파문을 일으켰고 그 불쾌감이 내내 나를 불편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 피로감으로 나는 소중한 연휴의 휴식을 저당 잡혔다. 낯선 이들과의 만남에서 오는 불편함보다 익숙한 이들에게서 받는 불쾌감이 더 큰 후유증을 남긴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았다. 혼밥족이 늘어가는 세상, 우린 상처를 주고받는 일이 힘겹다.
낯익은 이들조차 낯설게 대하고 싶어지는 명절 연휴의 끝자락에서 나는 혼란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