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겨울

휴직일기, -53일(2022. 1. 6)

by 낙산우공

코로나 팬데믹으로 전 세계가 멈추고 가리고 움츠러들었지만, 삶은 여전히 계속된다. 생로병사와 희로애락은 동서와 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의 역사와 늘 함께 하였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기 마련이고, 그 끝을 맞이하면 우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이를 기념한다. 웬만한 장애쯤은 이 삶의 방식을 막을 수 없다.


두 아이의 입시를 지원할 겸 직장생활 20년을 넘겨 처음이자 마지막 휴직을 감행하였기에 나름의 해피엔딩을 기념하기 위해 새해 벽두부터 제주도에 왔다. 물론 온 가족을 이끌고(반려견 호두까지)… 겨울의 제주는 처음이라 해외여행에 준하는 장장 일주일의 시간을 어떻게 채울지 고민이 많았다. 최대한 많이 걸어보겠다는 각오로 도착한 제주는 둘째 날부터 온종일 비가 왔다.


주간 날씨예보를 예의 주시해 왔기에 혹시나 하는 기대가 없지는 않았지만 각오했던 일이다. 그래서 예정대로 온갖 박물관이 넘쳐나는 제주를 체험하였다. 제주의 박물관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국공립과 사립… 설립목적이 확연히 다른 이 둘은 명확하게 성격과 운영방식에서 구분된다. 결국 대부분의 관광객은 한 시간 남짓의 관람을 위해 주머니를 털어버리는 사설 박물관에 집중된다. 이 모든 게 자본주의의 놀라운 결과물인 것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매번 아쉽다. 자본주의는 철저하게 자본에 충실하다. 국공립 시설이 자본에 관심을 둘 리 없다.


그렇게 10년 만에 찾은 뮤지엄들은 여전히 관람객으로 넘쳐났지만 콘텐츠의 변화는 없었다. 그저 제주를 찾는 가족단위 관광객의 코스에 빈틈을 채우려는 전략이 여전할 뿐 도대체 이런 시설이 왜 제주에 있지? 하는 궁금증을 풀어주지 않았다. 굳이 그럴 이유도 필요도 느끼지 못하는 듯 그들은 여전히 당당한 위용을 자랑하며 대한의 관광 인프라에서 독보적인 지위를 차지하는 제주에 생뚱맞게 자리하고 있었다. 새롭게 발견한 그리스신화박물관이 그 특징을 더 강화하고 있을 뿐…


셋째 날은 맑았다. 다행히도 나의 예상은 적중하여 따뜻한 제주에도 고도가 높은 한라산 주변은 밤새 눈이 내렸다. 하루를 공쳤다는 아쉬움을 날려 버리 듯 셋째 날의 한라산 중턱은 겨울왕국이 되어 있었다. 1100 고지는 뽀로로나 눈의 여왕이 사는 세상이었고 해안에서 바라본 백록담 분화구는 아이거 북벽을 연상시키듯 신비롭고 장엄했다. 이 하루의 일정만으로 겨울의 제주는 우리에게 톡톡하게 본전을 치렀다.


제주가 세계 7대 자연경관이니 아니니 하는 논란은 의미 없다. 그저 제주가 한반도 부속도서에 포함되어 있고 한겨울에도 시들었지만 여전히 야자수가 자라고 있음에 감사한다. 여행의 목적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색다른 풍광, 색다른 시선 그리고 색다른 감상을 준다는 공통점을 지녔다. 대한민국의 제주는 그 기능에 충실하다. 그 존재는 번번이 실패하는 흑돼지구이나 갈치회 따위가 대체할 수 없는 묵직함을 지녔다.


그래서 난 몇 년쯤 후에 또 제주가 그리울 것이다.




오늘의 감상,

제주 여행의 또 다른 묘미는 해외여행이 아님에도 면세점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명품 브랜드로 넘쳐나는 유수의 민간 면세점이 아니라는 것이 다를 뿐 대부분의 평범한 면세점 수요에 부합하는 화장품과 주류는 적당히 갖추고 있다.


유난히 시계에 관심이 많은 둘째 아이의 졸업 선물로 면세점을 선택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난 3만 원대가 넘는 시계를 구매한 일이 없지만(혼수를 제외하고), 아들의 취향은 달랐다. 그래서 아빠가 선물하는 생애 마지막 시계라는 전제로 고가의 브랜드 상품(내 기준이지만)을 허락했다.


그런데 중문단지 면세점에 들렀다가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은 내국인용 제주 면세점을 두 곳의 서로 다른 공기업이 각각 운영하고 있다는 것이었다.(중문단지와 제주공항에서) 더욱 놀라웠던 것은 동일 브랜드 동일 모델 시계의 면세가가 두 곳에서 무려 90달러 차이가 났다는 사실… 난 비 오는 둘째 날 중문면세점에서 11만 원이나 비싸게 구매한 시계를 취소하고 제주공항 면세점의 인터넷 사이트에서 재예약을 했다.


여행 오기 전부터 인터넷 면세점에서 아이가 점찍어둔 품절 모델을 중문에서 발견한 기쁨에 덥석 구매를 했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인터넷 사이트를 재방문한 나의 치밀함이 11만 원을 절약한 것이다. 나의 절약 노하우를 자랑하려는 이야기가 아니다. 대한민국 공공기관이 이렇게 어이없게 운영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중문의 면세점은 제주특별자치도가 직접 설립한 공기업이었고, 공항 면세점은 중앙정부가 설립한 곳이었다. 대부분의 소비자는 이 두 곳이 다른 기관이라는 사실 자체를 모른다. 특히 이 두 곳이 국가(지방자치단체)가 설립하여 운영한다는 것은 더더욱 모른다. 두 기관의 설립목적은 공공의 이익을 증진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것이다. 기업의 이윤을 창출하는 민간기업과는 태생이 다르다.


우리는 모두 공공이다. 중문면세점을 이용하건 공항 면세점을 이용하건 관계없이… 눈뜨고 코베이는 일에 공공기관이 개입해서야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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