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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낙산우공 Feb 03. 2022

소외의 발견

왕따라도 괜찮아(2017. 3. 2)

나이를 먹을수록 인간관계가 소원해지고 유붕이 자원방래하더라도 불역락호아하는 일은 좀처럼 없다. 유독 내게만 해당되는 일은 아닐 것이지만, 내가 그중 유난스러운 부류라는 것도 틀리진 않다. 월요일 아침에 출근하면서 한 주간의 스케줄을 점검하다 보면 지인과의 불가피한 저녁 약속뿐만 아니라 업무적인 회의, 세미나 참석조차도 마음을 무겁게 하니 말이다. 어려서는 이기지도 못하는 술을 퍼부어 가면서 술자리를 쏘다니고 폭넓은 관계의 스펙트럼을 은근 뿌듯하게 여기던 시절도 있었던 내가 어찌도 이렇게 숨고만 싶어 졌는지를 곰곰 생각해 본다.


외향적인 성격은 아니지만 낯을 심하게 가리거나 말을 더듬지는 아니하였다. 그 덕에 조금 편한 자리에서는 가끔 좌중의 시선을 장악하기도 하였다. 주목받는다는 것은 인간에게 자존감을 확인시켜주는 간편한 방법이다. 이것에 익숙해지다 보면 중독의 단계로 들어서기도 한다. 주목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인간의 욕구는 뜬금없는 무리수를 자초하게 하는 것이다.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된 것이 인간의 삶이라지만 우린 그 헛된 삶을 무려 80년 넘게 살아가야 한다. 그 무수한 날들을 모두 헛되다고 여기며 지낸다면 어찌 버텨낼 것인가.


무의미한 하루하루에 호흡을 불어넣는 일이 필요하다. 그 짜릿함과 들뜨는 기분, 유쾌한 두근거림은 생명이 생동하는 어린 시절에는 부지불식간에 내게 찾아왔다. 그래서 늘 그런 감정이 나를 감싼 채 영원할 거라 생각했다. 친구와의 만남도, 연인과의 밀회도, 친한 선배와의 대화도 모두 흐뭇한 일상이었다. 그렇게 지루할 틈이라고는 없는 삶이 연속될 것이라고 믿었다. 좋아하는 책을 붙들고 하루 종일 뒹굴거릴 시간은 그림의 떡이었다.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이제 40대 중반의 고개를 마악 넘고 있는 나는 분명 늙어가고 있다. 부정하려 하여도 불쑥불쑥 찾아오는 피로감, 하루만 무리한 일정을 소화하면 어김없이 몸의 어딘가는 고장이 나고 만다. 그 기력의 쇠락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내 관계 기피증에 톡톡히 찬조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나이를 먹고 사회경험이 쌓여가면서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통찰력이 생긴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인간의 유형을 분류해 내는 경험치가 무시할 수 없는 직관력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그조차도 내 아집의 산물일 수 있지만 말이다.


서른을 넘은 인간은 천재지변을 겪지 않고는 바뀌지 않는다. 세상을, 인간을, 관계를 바라보는 시선과 태도는 절대 변하지 않는다.  변화를 인정하는 순간 그들은 성인으로 살아내기가 버거워지기 때문이다. 이제 변화하지 않는 완고한 나를 버텨낼 방법은 관계의 단절밖에 없다. 스스로의 존재감을 방어할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스스로를 가두는 일이다. 상당한 에너지가 소모되는 타인과의 충돌을 미리미리 예방하는 것이다.  주위의 모든 관계는 대부분 기성세대다. 그들은 확고한 신념체계에 갇혀 있다. 그것이 논리적이건 그렇지 아니하건 관계없이 말이다.


내게는 이런 선입견이 생겨 버렸다. 별생각 없이 참석한 모임에서 마음의 상처를 입고, 초라한 자신을 인지하는 일이 점점 늘었다. 그 불편함과 불쾌감은 관계의 친소 정도와 무관하게 발생하곤 했다. 그리고 조금씩 그들과의 관계를 멀리 해 보니 나는 훨씬 자유롭고 평안해졌다. 이제 소원해진 나에게 서운해하는 이들의 푸념과 비난을 적절히 수용하는 한편 가끔씩 얼굴을 내밀며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정도가 나에게 유일한 번거로움이 되었다.


가끔은 멀어진 나에 대해 그들이 호소하는 서운함이 과거의 친밀감일까? 지금의 나에 대한 아쉬움일까? 혼란스럽기도 하다. 무엇이든 관계없다. 내가 살아갈 날들은 살아온 날보다 적을 확률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먼지만 한 존재감도 없이 사라질 하찮은 내 삶에 그런 감정 낭비는 분명 사치다. 나는 정말 편하게 언제든 기껍게 상대의 비난을 감수할 수 있는 관계만을 남기고자 한다. 그리고 나머지 모든 관계는 그저 과거 인연의 끈, 매정하게 끊을 수 없는 줄이라고 여긴다. 그것이 혈연이건, 학연이건, 지연이건, 그밖에 어떤 사건으로 연결된 관계건 똑같이 대할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소외하다 보니 나에겐 풍부한 시간의 축복이 내리고 있다.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이건 이렇게 흠뻑 고독해 본 적은 없다. 그 무료함이 아직은 낯설지만 난 분명 내게 남은 시간의 주도권을 빼앗아오고 있는 중이라고 믿는다. 모든 불편하고 불필요한 관계의 단절이 만들어 준 선물이다. 꼭 꽁지머리를 하고 지리산으로 들어가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요즘 젊은이들의 혼밥, 혼술 문화와 닮아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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