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 선샤인에서 나의 아저씨까지

휴직일기, -33일(2022. 1.26)

by 낙산우공

TV 드라마를 시청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단순히 심심하고 지루한 시간을 메우기 위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각자의 취향에 따라 꽤 진지하게 선호를 가려 취미활동처럼 즐기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저마다의 이유로 수많은 사람들이 드라마를 본다. 예능프로그램이 대세가 되었어도 끊임없이 드라마가 제작되는 걸 보면 말이다.


어릴 적에도 TV 드라마를 챙겨보지 않는 편이었으나 나이를 먹으며 점점 멀어진 이유는 전에도 얘기한 것처럼 몰입감이 현저하게 떨어진 탓이다. 주인공 누구에게도 투영될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나는 태양의 후예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영화도 챙겨보지 않는 아내가 꼬박꼬박 본방 사수하는 것이 신기했지만 주책맞게도 그저 송중기라는 배우에 꽂혔겠거니 하였다.


그런 내가 휴직하고 처음으로 넷플릭스를 통해 정주행 했던 드라마가 미스터 선샤인이었다. 아이들의 입시 준비로 덩달아 바빴던 나는 잠시 한두 시간의 짬이 날 때마다 이 작품을 꼬박꼬박 챙겨보았다. 이 드라마가 장안의 화제였을 때엔 거들떠보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이유는 역사적 배경을 병풍 삼아 주인공의 로맨스를 잔뜩 펼쳐놓았으리라는 강한 선입견이 거부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주인공의 애틋한 사랑을 부각시키기 위해 국운이 쇠하던 조선말을 끌어와 놓고는 로코를 찍어댔으리라는 짐작이 틀리진 않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내가 이 드라마에 눈을 뗄 수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애절한 주인공 때문이 아니라 저마다의 사연을 간직한 등장인물들의 뛰어난 연기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드라마의 축은 이병헌과 김태리였지만 유연석, 변요한의 존재감은 이들에 밀리지 않았다. 특히 함안댁과 행랑아범이나 미 대사관 역관으로 나오는 조우진 등 조연배우들의 연기는 나에게 몰입감을 선사하기에 충분하였다. 이 드라마가 역사의 현장을 사실감 있게 묘사했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오백 년 된 나라가 망하는 과정에서 이런 일들 쯤 있을 법도 하겠다는 기대감을 충족시키기엔 그만이었다. 엄청난 시청률을 찍어대는 스타 작가에게도 역사의식은 남아 있었다.


미스터 선샤인의 최종회를 본 후 더 이상 내게 흥미를 끄는 드라마는 나타나지 않았다. 역시 내가 드라마를 보지 않던 시간에도 아쉽게 놓친 드라마는 별로 없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다시 드라마와 소원한 시간이 계속되다가 복직을 한 달 남짓 남기고 우연히 나의 아저씨라는 작품에 꽂혀버렸다. 첫회에서 지나치게 어두운 분위기 때문에 시청을 포기할까 했으나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 전체적인 스토리라인을 예측하기 어려워 한편을 더 보다가 중독이 되어버렸다.


이 암울한 40대 중후반 아저씨 이야기를 보다 보면 모든 게 비현실적이라는 걸 알게 되지만 그 극단적인 인물에 매료되고 그들의 연기에 빠져버린다. 이 드라마는 내 또래 아저씨들의 가장 궁상맞은 삶을 보여주는데 거기에 묘하게 판타지를 입혀버린다. 그것이 터무니없는 환상이라는 걸 알지만 헤어 나올 수 없는 건 내가 그들의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너덜너덜해진 중년의 모습 말이다. 그런데 그들은 파격적일 정도로 인간적이다. 단언컨대 현실에서는 찾을 수 없다. 대부분 그 나이가 되면 구질구질하게 살거나 아니면 구질구질하게 살지 않으려고 더 구질구질하게 살기 때문이다.


겉으로 번듯해 보이는 중년 중에는 속으로 더 꼬여있는 인간이 많다. 그 속을 들여다보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부딪혀야 할 때가 있다. 그 순간 정신 차리지 않으면 그들과 똑같은 나와 마주해야 한다. 그래서 어릴 적 편했던 친구조차 섣불리 만나기 두렵고 만나도 편하지 않다. 우리는 화창한 젊은 날에 어울렸으나 찌그러진 내면을 감춘 늙은 모습으로 다시 대면하였기 때문이다. 유쾌한 기억만 더듬다가 헤어지기만을 바랄 뿐 긴장을 놓을 수 없다.


그런데 이 드라마의 인물들은 그렇지 않다. 초라한 중년이 되어 밤마다 동네 술집에서 어울리고 주말마다 조기축구 모임을 한다. 그들은 여전히 응답하라 1988의 골목 친구다. 이를 판타지가 아니라 말할 수 없다. 불쌍한 소녀가장을 괴롭히는 사채업자와 맞짱을 뜨고 어머니 앞에서 형제들에게 모욕을 준 양아치 건축업자를 망치 하나로 응징한다. 가히 슈퍼히어로 영화를 방불케 한다. 게다가 평생 바르고 성실하게 살아왔는데 아내는 직장상사와 바람이 나고 회사는 실력으로는 에이스인 주인공을 자르지 못해 안달이 났다. 그래도 주인공은 그들처럼 권모술수를 부리지 않고 정직하고 떳떳하게 원칙을 지킨다.


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 내가 그저 동년배라는 이유만으로 빠져들었을까? 아이유라는 배우를 발견했고 이선균이라는 배우를 다시 한번 확인했지만 그 밖에도 이 드라마의 캐스팅은 화려하다. 아마도 이 이야기가 주인공의 직장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게 복직을 앞둔 내게 남다르게 다가온 탓일 거다. 억울하고 분한 상황을 겪는 것으로는 이 드라마 주인공이 갑 중에 갑이다. 나는 그 주인공만큼 정직하지도 착하지도 능력 있지도 잘나지도 않았다. 게다가 그가 당하는 것에 비하면 나는 세상 편하게 직장생활을 해왔는지도 모른다.(물론 주인공의 상황이 드라마틱한 것은 이 작품이 다큐가 아니라 드라마이기 때문이지만)


총 16부작 중 12부까지 3~4일 만에 내달린 나는 이 드라마가 해피엔딩일 것이라 확신하지만 그 극강의 비현실적인 결말이 기다려지는 이유는 내가 현실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판타지의 여왕 J.K 롤링은 세상을 바꾸기 위해 마법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고 했다. 인간은 이미 그럴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세상을 바꿀 희망 따위는 없다. 그저 세상을 견디기 위해 소소한 판타지가 가끔 필요할 뿐…




오늘의 감상,

코로나19 확진자가 1만 명을 넘긴 오늘 나는 아껴 두었던 3차 부스터 샷을 맞았다. 또 언제 4차 접종 이야기가 나올지 몰라 최대한 복직 즈음에 맞으려 했으나 설 연휴를 무사히 넘기기 위해 아낌없이 맞았다. 오후 늦게 백신을 맞고 와서 욱신거리는 왼팔을 부여잡고 나의 아저씨를 3회 연속 시청했다. 아이유 팬인 딸아이가 종종 같이 보는데 이 지질한 직장 이야기를 보여주는 게 과연 조기교육인지 궁금해졌다. 이 드라마 판타지의 정점은 사실 서너 살 터울의 3형제가 거의 일란성쌍둥이들보다 진한 형제애로 뭉쳐 있다는 사실이다. 3형제의 막내인 내겐 이보다 더한 판타지는 없다. 특히 모든 걸 희생하는 주인공이 3형제 중에 무려 둘째다. 웃음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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