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일지, +36일(2022.06.15)
역대급 가뭄이라는 뉴스를 접하기 전에는 잘 몰랐다. 그냥 요즘은 비를 보기 힘드네 하면서 무심코 넘어갔다. 도시에 살다 보면 그렇게 되기도 한다. 메마른 풀도, 흙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오래전 미국 캘리포니아에 출장 갔을 때 무심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산에 나무는 없고, 전부 잔디가 깔린 것처럼 푸르네요... 너무 예뻐요..." 그랬더니 현지인이 어이없어하며 이렇게 말했다. "여기는 사막이라 산에 나무가 자라지 않아요. 그래서 아주 간혹 비가 온 다음날이면 맨땅에 풀이 돋아나지요..." 시내에는 가로수가 있어서 사막인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기도 했지만 그렇게 나는 주위를 둘러보지 못하고 산다.
현지인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시내에 뻗은 가로수들도 동부에서 본 아름드리나무와 달리 예쁘지 않았다. 시청에서 날마다 물을 뿌려서 관리하는 나무들이라 자연에서 한껏 양분을 먹고 자란 것들과 같을 리 없었다. 그런 건조한 사막에 거대한 도시가 내려앉았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며칠을 머물렀다. 그리고는 나중에 LA가 어떻고 저떻고 떠들어 댔을 것이다. 비가 오지 않았다면 사막에 지어진 도시라는 사실도 모른 채 말이다.
모든 인간은 이기적이다. 그래서 당연히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한다. 그건 필연이다. 하지만 그것이 자연의 섭리라는 핑계로 그 뒤에 숨을 순 없다. 인간은 고등한 생명체라서 이성적이고 지적인 사고를 하기 때문에 그렇다. 면책이 되지 않는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읽으면 감동이 밀려온다. 첫 번째는 작가의 엄청난 통찰력에 놀라고, 두 번째는 과학자인 작가의 필력에 감탄한다. 마지막으로 작가의 글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나의 지적 능력에 낙담하기도 한다.
어쨌든 이 글에서는 아무런 의식이 있을 리 없는 유전자에게 "이기적"이라는 감정을 투영하여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이 책에서 인상 깊었던 부분이 있어 잠시 소개해 본다. 유전자의 이기성이란 결국 자신의 유전자가 무한 복제되어 지속될 수 있도록 생명체가 진화했다는 가설이다. 즉, 유전자의 복제에 유리한 방향으로 모든 생명체의 진화를 설명하고 있다. 유전자가 보존되기 위해서는 당연히 그 유전자를 보유한 생명체가 보존되어야 하고 그 생명체가 세포분열을 통해 유전자를 끊임없이 복제해야 한다. 그래야 해당 유전자가 지구 상에서 사라지는 일을 막을 수 있다.
그 관점에서 보면 이기적 유전자 가설이 인간의 이기성을 설명해 주는 것이다. 인간이 이기적인 행동을 하는 것은 이기적 유전자가 자연생태계에 더 잘 적응해 왔기 때문에 인간의 몸이 이런 유전자들로 이루어진 탓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주변에서 이타적 행동을 하는 이들을 어렵지 않게 만나게 된다. 그렇다면 이건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에 대해 작가는 모든 인간이 이기적 행동을 하게 되면 그 집단은 결국 자연에서 도태되기 때문에 이기적 인간과 이타적 인간이 절묘하게 조합된 집단이 더 생존에 유리했다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심지어 어떤 비율의 조합이 최적인지를 수학적으로 계산까지 해주면서 말이다.
이런 이유로 다행히 세상에는 여전히 이타적인 인간이 존재한다. 그러나 나는 이기적 인간이다. 그리고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아직도 헤매고 있다. 역대급 가뭄이라는 보도가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간간히 비 소식이 들려왔다. 일주일 넘게 오는 둥 마는 둥 하지만 자고 일어나 보면 비가 와 있거나 사무실에 앉아 있는 낮 사이에 부슬부슬 내리다 마는 식이다. 덕분에 차는 매일 더럽다. 보통 두 주에 한 번씩 세차를 했는데 요즘은 매주 세차를 해도 하루 만에 흙먼지로 덮인다. 그러던 차에 요 며칠 비 소식이 계속되었고, 나는 시원하게 비가 내려 차의 먼지를 씻어버리고 싶었지만 비는 기상청의 예보와 다르게 항상 밤에만 왔다. 낮에도 비가 왔지만 어설프게 내리는 바람에 지하주차장에서 잠자던 차를 빼고 나면 더 더러워지기 일쑤였다.
그게 화근이었다. 매일 비 소식이 있으니 세차를 하기도 그렇고, 낮에 비라도 시원하게 내려 더러움을 조금이나마 씻겨줬으면 하는 바람은 언제나 예보와 엇갈렸다. 오늘 아침도 그랬다.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 주려 일찍 나왔는데 밤새 내리던 비는 소강상태가 되었다. 갑자기 짜증이 몰려왔다. 기상청 예보는 비가 오는 시간이 한 시간 단위로 한 시간씩 밀렸고 어제는 밤 10시에 집에 왔건만 비 한 방울 구경하지 못했다. 그런데 다시 밤새 좌악좌악 내리던 비는 아침 출근길에 여지없이 멈췄다. 그래서 살짝 부아가 올라오던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평일 아침 출근시간에 장대비가 내리는 걸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지하주차장에서 비 한 방울 맞지 않고 차에 타서 다시 지하주차장이 있는 사무실로 출근하는 이들을 제외하면 말이다. 나의 아이도 학교 근처에 내려주면 장대비를 맞으며 백 미터 넘게 걸어가야 하는데, 나는 고작 더러운 차를 씻어낼 생각만 하고 있었구나. 나 자신이 한심하고 부끄러워졌다. 그런데 언제나처럼(?) 이렇게 정신을 차리고 나니 빗방울이 굵어졌다. 앗차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비는 오전 내내 주룩주룩 오고야 말았다. 역대급 가뭄이 해갈되기만 한다면 비가 밤에 오건 낮에 오건 무슨 상관이겠는가? 나는 참으로 이기적 인간이었다. 휴직기간 동안 소액이지만 잠시 보류했던 유니세프 후원을 어젯밤에야 비로소 재개했던 인간으로서 나 자신이 참으로 가증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