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일지, +52일(2022.07.01)
‘세월이 약이다’라고 하면, 보통 견디기 힘든 상황이나 감당할 수 없는 절망이라도 시간이 흐르면 그럭저럭 버티게 된다는 의미로 쓰인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시간이 아니라 망각이라는 기제가 힘든 기억을 지워버리기 때문에 복받치는 감정이 누그러질 뿐이다. 결국 우리의 기억은 유한하여 어떤 슬프고 서럽고 애달프고 억울한 일도 시간이 흐르면 서서히 지워진다는 얘기다.
나의 의문은 여기서 출발했다. 기억이 지워진다고 하여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기억에 담아두어 봐야 마음만 아프게 되는 일이라면 망각이라는 기능이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작용할 것이다. 그런데 망각이라는 놈은 지워야 할 것과 지우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하지 않는다. 그 경중을 판단하지 않고 그저 시간의 순서에 따라 기억을 지운다. 기계적인 메커니즘이다.
역사를 배우다 보면 국가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치욕적인 사건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강제합병, 식민통치와 수탈의 역사는 우리가 매년 3.1절, 광복절 등을 통해 잊지 않기 위해 애를 쓴다. 그 시대를 살아보지도 않은 우리 세대조차 사회적 유전자를 물려받아 그 아픔을 공유한다. 왜 국가가 나서서 이런 기억들을 해마다 돌이켜 온세대가 되새기게 하는 것인가? 이유는 뻔하다. 반복되어선 안 되는 역사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역사도 마찬가지일 터... 세월이 약이 되어 아픈 기억이 전부 사라졌다고 하여 이제 살만하다고 느끼는 순간 나에게 동일한 충격의 사건이 또 터질 수 있다. 그리고 그제야 "맞아! 전에도 이랬는데..."라는 감상이 돌아온다면, 세월이란 나에게 약이 아니라 독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뇌는 그것을 구분하지 않고 지워버리기에 우리는 똑같은 어리석음을 반복한다.
따라서 시간이라는 자연법칙에 의해 망각되는 사건들을 아무런 의식 없이 떠나보내도 되는지를, 우리는 끊임없이 각성하고 판단해야 한다. 필요하면 이들을 다시 소환해야 한다. 역사를 잃어버린 민족에게 미래가 없듯이 지나간 과오를 지워버린 개인에게 내일은 없기 때문에 말이다. 그런데 나는 점점 무뎌져가는 나의 기억에 의지하여 오늘을 살고 있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세상에서 가장 편하게 사는 방법은 어제처럼 사는 것이다. 그런데 어제처럼 오늘을 살면서 내일이 변할 거라 기대하는 건 얼마나 어리석은가?"
요즘 '정신승리'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굉장히 상투적이고 오래된 이 단어를 젊은 세대들이 쓰는 것이 좀 이상해서 딸아이에게 어떨 때 이런 표현을 쓰느냐고 물었다. 아이는 인터넷 나무위키에 나와 있는 정의와 똑같은 말을 했다.
"본인에게 불리하거나 나쁜 상황을 좋은 상황이라고 왜곡하여 정신적 자기 위안을 하는 행위이며 실상은 자신의 망상으로만 이기고 있는 상황을 의미한다" (출처: 나무위키)
아마도 N포 세대라고 하는 젊은이들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조차 힘겨워 자기 합리화를 넘어 망상의 수준으로 왜곡하기에 이르렀는지도 모른다. 거기에 정신승리라는 단어를 대입한 것은 매우 적절하다 할 것이다. 아픔을 아픔으로 느끼는 것조차 감당하기 힘들 때 인간은 무의식으로 그 기억을 밀어낸다. 그래서 끔찍한 사고를 당한 사람들은 현장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들에겐 망각의 세월을 기다리기조차 힘겨워 기억을 지우거나 팩트를 왜곡하는 것이다.
내가 망각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다. 되새기고 싶지 않은 기억이지만 다시 반복될 수 있는 것이라면 어떻게든 현실을 바꿔야 하기 때문이다. 그저 기억에서만 지워버린다고 하여 미래에 닥칠 운명을 피할 순 없다. 그런데 요즘은 기억을 지우는 수준이 아니라 현실을 왜곡하여 해석하는 정신승리까지 등장했다고 하니 도대체 이 세상은 얼마나 형편없는 것일까? 끔찍한 현실을 바꿀 수 없다는 결론이 섰을 때만 우리는 무의식의 세계로 도피한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의 정신승리는 삭제가 아니라 왜곡이었다. 그것을 긍정의 힘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뜬금없이 흘러간 옛 노래 '애수의 소야곡'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오마는~~~~, 차라리 잊으리라 맹세하건만~~~~"
옛사랑은 슬퍼하다가 잊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정상적이지 않은 팍팍한 삶은 슬퍼하고 잊어봐야 무한반복되는 늪이다. 번뇌의 사슬은 해탈에 이르기까지 벗어날 수가 없다. 도리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