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일지, +58일(2022.07.07)
행운의 '7'이 두 번 반복되는 날이다. 음력 칠석은 견우와 직녀가 일 년에 한 번 오작교에서 만나는 애틋한 날이라지만 오늘은 양력 7월 7일, 서양력을 기준으로 하니 럭키 세븐이 두 번이면 복권이라도 질러야 하나 한 번쯤 고민해 볼 법도 한 날이다. 실없는 말이다.
지난주부터 왼쪽 귀 밑 목덜미를 시작으로 어깨를 타고 왼 팔까지 저려오는 증상이 나타났다. 오후가 되면 정도가 심해져 편두통까지 이어졌다. 워낙에 어깨와 목의 근육이 잘 뭉치는 탓에 그러려니 했는데 주말에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저녁에 반주 삼아 소주 반 병만 마셔도 혈압이 오르는지 두통이 더 심해졌다. 안 되겠다 싶어서 지난 토요일에 단골(이래 봐야 일 년에 서너 번 이용하는) 마사지샵에 들렀더니 5번, 6번 경추에 디스크가 있단다. 요즘은 병원에 가지 않아도 전문적인 의료용어를 무시로 듣는다.
예전부터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라도 찍으면 늘 들어오던 이야기라 새롭지는 않았지만 복직한 지 갓 4개월을 넘겼는데 벌써 내 몸은 탈이 나 버렸다는 사실에 서글펐다. 오십 대란 이런 것인가? 아내는 한방치료라도 받으라고 하지만 이 병은 내가 잘 안다. 쉬면 낫는다. 못 쉬니까 병원을 다니고 치료를 받는다. 그런데 대개 이런 치료라는 게 별 거 없다. 침을 맞고 물리치료를 받으며 증상을 조금 완화시켜주는 것이다.
무용을 전공하는 큰아이의 입시를 치르며 알게 된 사실이지만 병원은 병을 고쳐주는 곳이 아니었다. 병을 살살 달래주는 곳이다. 병 때문에 몸이 망가져 인생의 중요한 목표를 상실하지 않도록 말이다. 아무튼 민간보험회사들이 골머리를 썩는다는 실손의료보험 덕택에 우리의 병원 문턱은 너무나 낮아졌고 덕분에 재미를 보는 이들은 따로 있는 것 같다.
몸은 갈수록 제 기능을 상실한다. 노화는, 늙음은 죽음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그 속도의 차이를 인지하지 못하고 종국에는 똑같은 결과라는 사실을 망각한다. 그리고 그 결말을 더 앞당긴다. 속도의 차이를 인지하지 못하고 말이다. 복직하기 전에 맞춘 근거리 안경만으로는 노안의 진행을 막을 수 없어 거금(?)을 들여 다초점렌즈를 장만했다. 어지럽고 불편하여 적응하기 어렵다는 사람들의 말에 망설였는데 다행히 나는 새 세상을 만난 듯 잘 적응하고 있다. 과학의 발전은 노화를 극복하진 못해도 노화로 인한 서러움을 달래준다. 병원처럼 말이다.
어제, 대학에 입학해 첫 공연을 하는 딸아이를 응원하러 온 가족이 출동했다. 후텁지근한 날씨에 30분 넘게 줄을 서서 공연장에 좋은 자리를 잡고 9개 팀의 학부생들이 연출한 무대를 즐겁게 관람했다. 마지막 두 팀의 무대는 대학원생들의 순서였는데 명색이 창작발표회 자리인 데다가 어린 학부생들과 비교될 수 없다는 비장한 각오가 느껴졌다. 학부생들에 비해 3배가 긴 시간을 할당받은 대학원생들은 부족한 콘텐츠를 어떻게든 메워보려는 듯 여러 가지 소품을 활용했지만 그들의 어깨를 짓누르는 부담감에 매몰되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안타깝지만 나도 모르게 이런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용쓴다"
누군가로부터 이런 표현을 듣는 일은 매우 모욕적인 것이다. '애쓴다' 혹은 '고생한다'와는 차원이 다르다. 용쓴다는 말에는 이런 뜻이 숨겨져 있다. '능력은 안되는데 고생이 많구나', '아주 발버둥을 치는구나'와 같이 우월한 위치에 있는 자가 자신보다 조금 못하다고 생각되는 이들을 한심해하며 혹은 조소하듯 던지는 느낌이 있다. 그래서 어지간해서는 쓰지 말아야 하는 말이다. 나 역시 무심결에 그 말을 내뱉었지만 아무리 듣지 않는 자리에서라도 함부로 해서는 안될 말이다.
사실 내가 대학원생들의 공연에 대해 그런 저급한 표현을 썼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들은 학부생보다 3배나 긴 15분의 작품 시간을 받았지만 그 시간을 채울 아이디어는 부족했다. 그들이 대학원에서 어떤 공부를 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예술이라는 장르는 가방끈으로 비교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그런데 그들은 이미 대학원생이라는 우월적 지위에 도취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기껏해야 학부 졸업한 지 몇 년 안되었을 친구들인데 말이다.
나중에 아이를 통해 들은 이야기지만 대학원생 작품에 참여할 인원이 모자라 학부 1학년생 몇 명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그 아이들은 대학원생들을 언니도, 선배님도 아닌 무려 선생님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호칭은 묘한 위계를 만들어 낸다. 한 팀에서 함께 구르고 춤추는 학생들 사이에 선생님과 제자가 다 무엇이란 말인가?
모든 인간은 지위를 갖게 되면 그에 맞는 책임이 따른다. 나의 지위가 갖는 권위에만 도취되면 결국 퇴출된다. 그래서 '왕관을 쓰려는 자, 무게를 견뎌라'라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누구든 자신의 자리에 걸맞은 덕망과 소양과 역량을 갖추기 위해, 혹은 그렇게 비치기 위해 애를 쓴다. 그 모든 행동들이 내게는 '용쓰는' 모습으로 보였다.
그리고 어제 다시 생각했다. 왼쪽 목덜미부터 팔 끝까지 저려오는 나의 증상이야 말로 용을 쓰고 있기 때문은 아닌지 말이다. 용을 써야 살 수 있는 세상인 건지, 아니면 부질없이 내가 용을 쓰고 있는 건지 헷갈리는 날이다. 2022년의 7월 7일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