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일지, +28일(2022.06.07)
자존감의 뿌리가 취약한 사람들은 항상 주변을 의식한다. 상대와의 비교를 통해 자존감을 확인하는 것이다. 누군가 나보다 못한 사람을 보면서 자존감을 인식한다면 누군가 나보다 잘난 이를 만날 때 자존감은 사라질 것이다. 자존감은 타인들의 외적인 인정이나 칭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신 내부의 성숙된 사고와 가치에 의해 얻어지는 개인의 의식이라고 하니, 이렇게 누군가와의 비교를 통해 얻어지는 것은 결코 자존감이 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독립적으로 자존감을 회복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얼까?
우리는 태어나서부터 끊임없이 집단 속에서 타인과 어울려 산다. 단지 집단의 일원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각 구성원 사이에서 어떤 위치인지를 확인받으며 산다. 학교에서, 회사에서, 가정에서, 친구들 사이에서, 친척들 틈에서 우리는 지속적으로 알게 모르게 평가받으며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어떤 위치에 자리매김된다. 그런데 우리는 그 수치화되지 않는 서열을 민감하게 느낀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내가 집단 속에서 높게 평가받는지 그렇지 않은지 말이다.
우리가 인식하는 자존감의 실체는 사실 유능감이다. 유능감은 어떤 일을 남들보다 잘하는 능력이 있다는 느낌이다. 따라서 비교대상 없이 유능감은 확인되지 않는다. 그런데 남들보다 유능하다는 것은 남들보다 무능한 자가 필연적으로 동반된다. 즉 누군가는 무능하다는 느낌에서 헤어 나오지 못해야만 내가 자존감이라 포장된 유능감을 느낄 수 있다. 누군가의 불행을 전제로 한 행복은 완전할 수 없다. 언젠가 내가 누군가의 행복을 위한 불행의 사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대인은 불안하다. 내 불안의 실체는 무능해질 수 있다는 공포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학창 시절 노력한 만큼 성적이 나오지 않았을 때 내가 선택한 것은 도피였다. 공부를 게을리함으로써 결과에 대한 책임을 회피한 것이다. 내가 마음먹고 공부를 한다면 충분히 1등을 하고도 남겠지만, 난 1등 따위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을 뿐이며 그래서 성적도 이 정도 수준인 것이다. 나는 스스로 공부를 등한시함으로써 나의 유능감이 무너지는 것을 가까스로 그리고 온몸으로 막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행동은 비겁하고 위태로웠다. 남들처럼 열심히 공부했을 때 만족할 만큼의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면 난 공부를 못하는 아이로 낙인찍힐 것이다. 그 공포가 나를 부끄럽기 그지없는 행동으로 내몰았다.
내가 공무원이 된 것도 다르지 않았다. 신혼 초에 내 급여명세서를 본 아내가 말실수를 했다. 하필이면 성과급이나 기타 수당이 없는 평달 급여를 보았고 자신의 급여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나의 소득 수준을 확인하며 이렇게 말했다.
"애개"
이건 분명히 내 아내의 실수다. 나는 나의 연봉 수준을 결혼 전에 말했기 때문에 그달의 내 급여가 비록 작았더라도 난 아내를 속인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아내는 주변머리 없이 하찮다는 표현을 나에게 던진 것이다. 실수라기보다는 크나큰 잘못에 가깝다. 나는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여러 가지 변명을 늘어놓다가 급기야 화가 치밀었다. 남편의 급여명세서를 보고 "애개"라니? 이게 얼마나 무례하기 짝이 없는 태도란 말인가? 아내도 즉시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나에게 사과를 했지만 난 20년이 지난 지금도 그 말을 잊지 못한다. 내가 열심히 일한 결과는 나의 아내에게 "애개"에 불과했던 것이다.
나는 공무원이 되고서부터 연소득에 대해 관심을 껐다. 공무원의 연봉이 높으면 오히려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는다. 공무원은 돈을 벌지만 그게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내게는 공무원연금이라는 든든하진 않아도 나름대로 알찬 노후의 생계수단이 생겼다. 그래서 누구네 집 아빠의 연봉에 특별히 관심이 없다. 그리고 나의 소득이 내 삶의 질을 저하시킬 만큼 박봉인 것도 아니었다. 나는 공무원이 되고서 연봉에 대한 비교에서 해방되었다. 그러나 이것도 비교를 거부할 명분이 생긴 것일 뿐 비교 자체에서 내가 자유로워진 것은 결코 아니다. 따라서 나의 공직 입문도 일종의 도피다.
오십을 넘으면서 내가 느끼는 불안의 실체도 명확해졌다. 나의 몸과 정신은 예전 같지 않다. 노화는 체력만 저하시키는 것이 아니다. 지적능력도, 의욕도, 열정도 모두 방전시킨다. 따라서 나는 예전처럼 밤을 새우며 일할 수 없으며, 더 나은 결과를 낼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없다. 즉 내가 누군가의 유능감을 위해 희생될 수 있는 충분한 환경이 되었다. 그래서 난 불안하다. 내가 온갖 이유를 들어 휴직을 한 것도 결국 불안에서 시작된 것이다. 무능해질 것이라는 불안, 무능하다는 평가를 받을 것이라는 공포... 거기서 도피행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분명한 것은 나에게 복직은 불가피했으며, 더 이상 도피할 곳이 없어졌다는 사실이다. 도피를 할 수 없을 때 불안은 가중될 것이고 공포심은 내 의식을 마비시킬 것이다. 자 이제 어떡해야 하는가? 유능감의 상실이라는 공포로부터 도피했던 나는 이제 막다른 곳까지 왔다. 구석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물 듯이 나는 제정신이 아닌 상태가 될 수도 있다. 결국 도피는 최선이 아니었던 것이다. 학업으로부터의 도피, 연봉으로부터의 도피... 이제 업무로부터의 도피도 그 끝을 맞이했다. 나에게 남겨진 선택은 하나뿐이다. 유능감에 대한 강박을 내려놓던지, 구석에 몰린 쥐처럼 정신을 잃던지 둘 중에 한 가지가 남은 것이다.
아마도 유능감에 대한 강박을 내려놓는 게 쉬울 것이다. 도피의 끝에서 난 유능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걸 깨달았으니 말이다. 타인과의 비교를 완전히 배제한 채 나의 자존감을 찾는 길 만이 나의 해방이 될 것이다. 내려놓는 방법을 터득하는 게 오십대라는 말이 새삼 각인되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