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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낙산우공 Aug 06. 2022

반려견의 위로

늦둥이를 본다는 것

이번 휴가에도 어김없이 반려견 호두를 동반했다. 반려 인구 천만 시대라는데 강아지와 여행하는 일이 이제는 걱정만큼 부담스럽지 않았다. 벌써 다섯 번째 이 녀석과 동행하는 동안 우린 제법 능숙해졌다. 간혹 기대했던 맛집(9년 전 딸아이를 사로잡았던 광양불고기…) 출입을 거부당하거나 꼭 가고 싶었던 관광명소(명상할 때마다 듣던 제주 사려니숲길 빗소리 ㅠㅠ…)를 포기해야 하는 불편은 감수해야지만 그 정도야 이 녀석과 함께하는 즐거움에 비할 바 아니다.


처음 호두를 입양할 때 아내는 거의 천만 가지 이유를 들어 강력하게 반대했고 나는 천만 가구에 강아지가 산다는 말로 아내를 제압(?)했다. 물론 몇 년째 강아지를 키우고 싶다고 노래를 하던 아이들이 든든한 지원군이었지만, 아내는 마지막 순간까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하늘다람쥐를 키울 때도 구피를 키울 때도 아내는 다르지 않았다. 그때와 다른 건 이제 호두에게 푹 빠져있다는 것뿐…


생명체를 키우는 일은 동물이나 사람이나 크게 다를 게 없다. 언제나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수시로 터진다. 그 모든 경우의 수를 고려하며 아이를 키우는 사람이 없듯이 강아지를 키우는 것도 마찬가지다. 우린 무수히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하나의 생명체와 가족이 되었다. 그리고 이 녀석은 그저 선물이라고 표현하기엔 너무나 부족한 존재가 되었다. 나는 이 녀석을 가끔 아가 새끼(?)라 부르지만 사실은 우리 가족에게 내린 축복이었다.


큰애의 고3 수험생활을 앞둔 재작년 가을에 우리 집에 온 호두는 대부분의 강아지들이 그렇듯 사람을 격하게 따랐다. 껌딱지처럼 붙어 다니는 녀석이 가끔 성가실 때도 있지만 누군가에게 절대적인 대상이 된다는 건 놀라운 경험이다. 호두는 우리를 단순히 따르는 게 아니라 절대적인 신뢰와 애정을 보여줬고 나는 거기에 무한 책임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유전적으로 타고난 습성이든 생존전략이든 관계없이 호두의 초롱초롱한 눈을 보면 한순간에 모두가 무장해제되었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서 고향에 내려온 혜원에게 진돗개 오구를 안기며 재하가 해준 말처럼 모든 온기가 있는 생명은 의지가 되는 법이었다.


이 녀석은 얼마 전 갓 두 돌을 넘겼지만 때로는 할머니처럼 때로는 막둥이처럼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하며 우리에게 감동과 웃음을 안겼다. 심지어 성격이나 외모마저 우리를 닮아간다는 사실에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유난스러운 반려인이라 손가락질받아도 별 수 없다. 딸아이는 바깥나들이 때마다 호두를 예뻐하는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면 서운해할 정도가 되었다. 그렇게 우리 호두는 온 가족을 의지하지만 사실 우리 모두가 이 녀석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작년 딸아이의 수험생활이 절정을 달리던 시기에 새벽 무용레슨을 받기 위해 꼭두새벽에 기상하는 일은 일상 다반사가 되었다. 몸 푸는데 1시간, 레슨 1시간 30분, 도합 2시간 반을 홀에서 굴러야 하는(현대무용은 구른다는 표현이 맞다) 아이에게 기운 나는 무어라도 챙겨 먹이기 위해 아내가 제일 먼저 일어났고 아이를 연습홀에 데려다 주기 위해 내가 마지막으로 일어났다. 그때마다 방에서 거실로 나오면 어김없이 호두가 소파 한 구석에 앉아 걱정스러운 눈길로 나를 쳐다봤는데 마치 “아범이 고생이 많네… 오늘도 힘들겠지만 수고 좀 하시게”라고 말하는 듯 느껴졌다. 내가 이렇게 느낄 정도면 아이에게는 어떠했겠는가? 나는 호두가 딸아이와 함께 수험생활을 해 주었다고 믿는다.


이런 아이를 반려견 호텔에 맡기고 여행을 다닐 순 없었다. 우리는 여행 내내 호두를 데리고 다녔고 작고 약한 아이의 여독을 풀어주기 위해 항상 챙기고 살폈다. 더운 여름날 해변 파라솔 밑에서 고생하는 호두를 배려하여 3시간 만에 해수욕을 접었지만 누구도 아쉬워하지는 않았다.(물론 우리 식구 모두 나를 닮아 저질 체력이기도 했다)  어제는 강릉에서 서울까지 네 시간 넘게 차에 갇혀있던 호두를 위해 살이 제법 붙은 생돼지갈비뼈를 3개씩이나 챙겨 주었다.(살코기는 우리가 다 먹어치웠지만) 고기뼈를 좋아하는 줄은 알았지만 여행 내내 불편한 심기를 비치던 녀석은 한방에 텐션 높은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오늘은 아무 곳에도 나가지 않고 하루 종일 집순이 녀석의 여독을 풀어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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