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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낙산우공 Apr 23. 2023

다시, 나의 아저씨

다시 만난 동훈이가 말을 걸어왔다.

2022년 2월, 10개월의 휴직을 마무리하며 복직을 코앞에 둔 시기에 우연히 2018년에 방영한 드라마 “나의 아저씨”를 만났다. 복잡한 심경을 외면하고 도살장에 끌려가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버텨가던 그 무렵에 만난 40대 아저씨 박동훈의 판타지 드라마에 나는 제대로 꽂혀 버렸고 결국 복직을 운명처럼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리고 걱정했던 것만큼 끔찍한 직장생활을 겨우겨우 이어가던 그해 4월에 “나의 해방일지”를 만났다. “나의 아저씨”와 놀랍도록 비슷한 분위기의 이 드라마는 같은 작가의 작품이었고 나는 다시 해방을 꿈꾸며 현실의 고단함을 견디었다. 그렇게 조금씩 직장의 삶에 적응해 가던 시기에 아들의 우울증이 찾아왔다.


작년 가을과 겨울 그리고 올봄까지 내 삶을 송두리째 삼켜버린 아들의 투병생활이 이어졌고 나는 복직 1년 1개월 만에 다시 기약 없는 휴직에 돌입했다. 휴직 이틀차에 시작한 거제 한달살이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3주 만에 정리하고 내일 다시 서울에 간다. 오후 늦은 시각 숙소에서 우연히 켜본 방송에는 뜬금없이 “나의 아저씨” 1~4화를 연속 방영하고 있었고 나는 눈을 뗄 수 없었다. 결국 OTT로 5화부터 이어 보는 중이다.


1974년생 박동훈 부장은 사장으로 모시는 대학후배가 아내와 바람이 났고, 어렵게 살아오신 홀어머니는 신용불량자 형과 백수건달 동생 뒷바라지에 노후가 고달프다. 하나뿐인 아들은 조기유학을 갔고 직장에서는 사장후배 덕에 그를 쫓아내지 못해 안달이 났다. 그런데 그는 똥폼잡지 않고 묵묵히 삶의 무게를 견뎌낸다.


물론 인간적인 고뇌로 그늘진 얼굴을 벗어나지 못하지만 홀로 인간으로서의 자존을 지킨다. 온갖 협잡과 담합이 판을 치는 세계에서 그는 꿋꿋하게 인간이다. 오지랖 넓게도 딱한 처지의 파견직 사원까지 챙긴다. 그래서 판타지 드라마다. 아내는 잘못을 뉘우치고 돌아오며 사장이던 후배는 회사에서 쫓겨나고 동훈은 임원으로 승진한다. 그렇다고 해피엔딩으로만 볼 수는 없다. 그래도 판타지다.


오늘 다시 만난 동훈이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힘드니? 다들 그렇게 살아. “


동훈이는 주로 어둡고 가끔 한숨을 쉬며 아주 가끔 혼자 소리를 지른다. 그는 모든 걸 속으로 삭인다. 그런데 동훈이는 나보다 두 살이나 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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