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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낙산우공 Apr 25. 2023

우퍼 스피커의 추억

아이들의 보물상자

결혼하고 5년 만에 처음으로 내 집을 마련했다. 새 집으로 이사하면 꼭 해보려던 게 있었으니 AV시스템을 갖춰 보는 일이었다. 결혼할 때 TV에 크게 투자를 하지 않았는데 내 집에서 만큼은 근사하게 꾸며 놓고 싶어 큰맘 먹고 질렀다. 벌써 16년 가까이 된 일이다.


주문한 DVD세트가 배달되었을 때 저녁 내내 설치하느라 애를 먹었지만 그 시간마저도 즐거웠던 기억이 남아있다. 아, 이런 게 사는 재미인 거구나 싶었다. 4 way 서라운드 스피커에, TV 위에 올려놓는 길쭉한 프런트 스피커에, 우퍼 스피커까지 갖추고 나니 영화를 볼 때도 음악을 들을 때도 마냥 행복했다.


그때 유독 마음에 들었던 것이 근사한 중저음의 우퍼였다. 듬직한 크기도 어울렸고 아래쪽에 둥그런 구멍이 뚫린 디자인도 마음에 들었다. 지금도 근사한 소리를 내는 나의 AV시스템은 안타깝게도 예전처럼 쓸모가 없다. 음악을 CD로 듣지 않고 영화를 DVD로 보지 않는 세상이 왔는데 이놈은 블루투스 기능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여전히 우리 집 거실을 빛내주고 있다.


오늘 갑자기 애정하던 우퍼를 보는 순간 이 녀석의 기능을 파격적으로 확장시켰던 내 아들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우퍼 스피커 하단에는 구멍이 뚫려있다. 어른 손은 들어가지 않는 그 작은 구멍에 언젠가부터 들째가 손을 넣기 시작했다. 아이에게는 그곳이 가장 안전한 개인금고 같아 보였나 보다.


혼자 그 안에 무언가를 넣었다 뺐다를 반복하면서 얼굴 한가득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 무엇을 그렇게 보관하냐고 물어도 아이는 대답해 주지 않았다. 어떤 날은 나의 차 키를 그곳에 숨겨놓고는 출근이 급한 내게 거래(?)를 요구한 적도 있었다. 손이 들어가지 않으니 아이에게 사정하지 않으면 딱히 방법이 없었다.


하루는 둘째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큰애에게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꺼내봐 줄 수 있냐고 했더니 흔쾌히 손을 넣었다. 그 안에는 온갖 잡동사니가 한가득이었는데 포켓몬 카드에서부터 별의별 것들이 다 들어있었다. 큰애의 손에서 발견되는 것들마다 기상천외하여 우리는 배꼽을 잡고 웃었다.


바로 코앞에 있는 공간을 보고도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니 아이는 신이 났는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누나에게 다 털린 것을 알면 얼마나 속이 상할까? 우리는 서둘러 모든 물건을 제자리에 돌려놓고 시치미를 떼었다. 그 뒤로도 한동안 아들 녀석은 우퍼 스피커를 사금고로 애용했지만 이제는 이무도 그곳에 손이 닿지 않는다.


아이들의 손이 커져서 더 이상 그 공간에 접근할 수 없는 것처럼 나 역시 오디오로도 비디오로도 사용하지 않는 스피커들이 눈에 밟혔다. 그것들을 마음껏 사용하던 시절, 나는 젊었고 많은 일을 했지만 유쾌했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늙고 휴직을 했으며 우울하다.


내일은 오랜만에 낡은 CD라도 꺼내어 쌩쌩하지만 아무도 찾지 않는 나의 스피커들의 근질근질한 몸을 잠시라도 달래주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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