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업중단숙려제를 시작하다.
아이는 2022년 12월 26일 지하철 6호선 녹사평역에서 멈췄다. 천만다행으로 서강대교에 도착하기 전에 아이는 멈추어 주었다. 그런데 그 뒤로도 3개월 가까이 아이는 그곳에 그대로 멈추어 있었다는 사실을 나만 몰랐다. 아이의 몸은 집으로 돌아왔지만 아이의 영혼은 여전히 녹사평역 언저리를 맴돌고 있었다. 다시 광흥창역으로 향할까 아니면 집으로 돌아갈까... 아이는 그 갈등에서 결론을 짓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었는데 나는 이제 힘든 시간을 수습하고 다시 새로운 출발을 준비하려 하고 있었다. 참으로 어리석게도...
내 생각이 틀려먹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된 건 봄방학 기간에 감행한 일본 여행에서였다. 4년 전 영국에 다녀온 뒤로 코로나 시국이 터져 버려 아이들의 입시가 끝나고도 우리는 제주 여행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 아쉬움을 달랠 겸 멀리는 못 가지만 닌텐도 월드와 해리포터 성이 있는 오사카 유니버설 스튜디오(USJ)를 방문지로 정했다. 아이들 모두 열렬히 원했던 여행이라 조금 걱정이 되는 걸 감수하고 나는 가족 화합(?)의 장소로 일본행을 강행했다.
결과는 참담했다. 4박 5일 동안 한순간도 편한 적이 없었다. 출입국심사, 기내, 오사카 시내, 교토 여행지 모두에서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끊임없이 발생했고 그 정점은 USJ였다. 그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언급하고 싶지 않다. 다만 그때서야 나는 깨달았다. 아이는 녹사평역에서 멈추었는데 내가 그러지 못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여행을 다녀오고 한 주 뒤에 새 학년이 시작되었는데 예상대로 아이는 첫날부터 스텝이 꼬였다. 등교 전날부터 압박감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고 새벽녘이 되어서 다음날 등교를 포기한 뒤에야 아이는 잠에 들었다.
휴학이나 자퇴를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나 설마 그 지경까지 가겠는가 하는 막연한 생각이었고 병원도 상담센터도 아무런 조언을 해주지 못했다. 그런데 아이는 학교는커녕 기본적인 일상생활조차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 사실을 확인하고 결정을 해야 하는 건 나의 몫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아이에게 휴학 이야기를 꺼내었고 아이는 목 놓아 울었다. 난 소리를 낼 수 없어 심장으로 울었다. 아니 내 온몸이 울고 있었다. 아이는 살면서 처음으로 성취감을 맛보게 해 준 학교를 스스로 그만두어야 할 처지가 되었다. 억장이 무너지지 않을 리 있겠는가?
아이를 설득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기 시작했지만 사실은 막막했다. 복직한 지 1년 만에 다시 휴직을 할 엄두가 나지 않았고 그렇다고 집에 아이만 방치하는 건 더더구나 상상할 수 없었다. 그 망설임의 시기에 아이는 한주 동안 세 번 이상 집에서 졸도했다. 연락이 닿지 않아 놀란 마음에 119 구급대가 문을 따고 먼저 들어간 적도 있었다. 난 한주 내내 사무실에서 혼자 울었다. 집에서 울 수 없으니 칸막이로 가려진 책상 앞에서 소리 없이 울었다. 간혹 훌쩍이는 소리가 새어나갔으나 사람들은 내가 우는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으리라. 아이 생각을 하면 그냥 눈물이 났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쓰러지셨다.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응급실로 달려가는 차 안에서 난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31년 만에 대성통곡을 하며 울었다. 운전을 할 수 없을 만큼 눈물이 쏟아졌고 월드컵대교 진입로에서 차를 멈춰야 할 정도였다. 어머니 병실을 지킬 사람이 부족하다고 형들이 나를 찾았는데 나는 이미 사면초가 신세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때서야 결심이 섰다. 이제 멈추어야 할 때란 걸 직감적으로 느꼈고 모든 걸 내려놓을 용기가 비로소 생겨났다. 내가 휴직하기로 결정을 하고 나니 아이가 밝아졌다. 아이의 마음을 읽고 세심하게 배려하는 일에 서툰 엄마보다는 아빠의 보살핌을 원했던 아이는 나를 든든해했다.
아이는 아빠와 함께라면 다시 학교에 나갈 용기가 생겼다고 했지만 이미 아이의 몸은 쉬라는 신호를 강렬하게 보내고 있었다. 나는 아이의 학교에 학업중단숙려제를 신청하고 4월부터 아이와 둘이 남해안으로 한 달살이를 갔다. 아이는 3월 한달 동안 딱 두 번 등교를 했는데 한 번은 1교시를 마치고 조퇴했으며 두 번째는 학업중단숙려제 신청을 위한 위클래스 상담차 잠시 들른 게 전부였다. 아이는 멈추었지만 쉬지를 못했다. 집에서도 편안함을 느끼지 못했고 수면제를 먹고도 잠에 들지 못했다. 나는 이사를 결심하고 집을 부동산에 내놓고는 아이와 남해로 향했다. 거제의 레지던스 호텔을 한 달 동안 예약했다. 나는 아이가 녹사평역에서 멈춘지 백일이 다 되어서야 겨우 멈추었다. 다행히 어머니도 한 달 가까이 병원 신세를 지긴 했지만 집으로 돌아오셨다. 그렇게 나와 아들의 찐한 동행이 시작되었다.